인터뷰를 마치고 글 보따리를 풀며 그 사람과 마주했던 첫 순간을 떠올려본다. 그러면 이야기의 실마리가 보이곤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화의 끝이 먼저 떠올랐다. 작가 조민형, 그를 대기업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택한 당찬 여직원이라는 단순한 캐릭터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화의 끝에 우리는 몽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몽상에서 영감을 주로 얻는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하는 몽상은 대부분 현실에 가깝다. 눈앞에 보이는 물건, 장면, 사건을 시작으로 몽상이 시작되고 이야기가 생겨난다. 그렇게 만든 서사 속에 인물을 관찰하면 지금 우리가 생각해볼 거리들이 나타났다. <명동로망스>에서는 철거 위기에 놓인 명동의 작은 다방에 들어선 9급 공무원 선호가 50년 전 과거로 시간 이동을 하는 몽상, <정글 라이프>에서는 정글과도 같은 오피스 라이프를 살아가는 이 시대 직장인을 동물에 빗댄 몽상, 그리고 가장 최근작인 <#Cha_Me>에서는 자신이 동경하던 완벽한 모습을 그리며 SNS에서 만들어낸 포장된 모습의 또 다른 자신이 실제로 나타난다는 몽상을 통해 우리 삶에 질문을 던졌다. 필자는 이 인터뷰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이 곳이 남쪽 나라 어딘가의 해변 모래 위라면 어떨까, 그 곳에서 우연히 만난 두 한국인의 대화라면 어떨까하는 몽상을 잠시 했다. 그러자 대화의 무게는 한결 가벼워졌고, 이야기는 더욱 깊어졌다. 몽상과 현실을 오가며 나눈 이야기를 전해본다.

 





모두 원해. 모두 원해. 모두 원해.

모두 원한다는라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최근작인 <#Cha_Me>를 영어로 번안하는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인 그가 말했다. 우란문화재단으로부터의 뜻밖의 제안. 미국의 NAMT(National Alliance for Musical Theatre)에 작품을 출품해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문화권의 언어로 작품이 번안되면 어떨지, 그 궁금증과 함께, 이번 기회를 통해 작품을 보완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도전을 시작했다. 작업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책으로 따지면 2판이 나오는 것과 같은 작업이나 다름이 없었다. “영어에서는 주어와 목적어가 빠지면 문장이 완성되지 않더라고요. ‘모두 원해라는 가사가 있었는데, 그 가사가 세 번 정도 나와요. 그런데 모두 원해라는 말에는 주어와 목적어가 없기 때문에 매번 다른 느낌으로 들리죠. 문장이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술하기 때문에 맥락에 따라 달리 전달되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 이미지를 영어로 표현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최슬기 작곡가와 소은정 번역가와 함께 그런 의미들을 구체화시켜 나가는 데 몰두하고 있어요.” 그는 가사의 의미를 완벽히 번역하는 것보다는 작품이 지닌 심상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듯했다. 영어 문화권의 관객을 대상으로 한다고 해서 작품의 배경을 억지로 해외로 잡거나, 주인공을 외국인으로 바꾸지도 않았다. “<#Cha_Me>의 소재이기도 한 소셜 미디어라는 공간은 굉장히 국제적이잖아요. 그렇게 국적을 막론하고 나눌 수 있는 공감대가 충분히 있는데, 작품의 현지화를 위해서 이 이야기를 억지스러운 미국 얘기로 만들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대신 주인공의 친구로 나오는 캐릭터를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외국인 유학생으로 설정했어요. 그 인물을 매개로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심리를 좀 더 자연스럽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더라고요.” 몽상으로만 남겨질 것 같았던 <#Cha_Me> 영어 버전은 그렇게 하루하루 현실로 바뀌어가고 있다.

 


퇴적되는 마음들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거치면서 그는 자신이 고른 단어들과 다시 마주하게 됐다. “번역하면서 제 작품에 중의적인 표현이 꽤 자주 나온다는 걸 새삼 느꼈어요. 같은 단어라도 어떤 상황에서 쓰였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졌죠. 그 차이를 전달하려다 보니 저 스스로도 작품을 다시 뜯어보게 되더라고요. ‘여기에선 어떤 의미로 썼었지?’ 하고 되물으면서요. 같은 대사가, 다른 멜로디를 입고 등장시키면 의미가 달라져요. ‘이해해라는 가사가 그랬어요. 처음에는 의미 없이 관성적으로 튀어나오는 성의 없는 위로처럼 들려요. ‘, 그래, 그래. 나도 다 알지.’ 이런 느낌으로요. 그런데 나중에 뒤에서 똑같이 이해해라고 말할 때는 정말 상대가 지고 있는 마음의 무게를 가늠하는 정도의 깊은 이해처럼 들려요.” 극이 진행됨에 따라 차곡차곡 쌓이는 인물들의 마음을 통해, 비로소 대사의 감정선이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다시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작품의 끝에 무엇이 남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확고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제가 작품 활동을 하면서 원하는 건 결국 공감인 것 같아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정도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내가 지금 이런 얘길 하고 싶어라고 의도를 주입하려 들기보다는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 같아요” <#Cha_Me>에서 역시 답은 없다. ‘소셜미디어에 꾸며낸 스스로의 완벽한 모습, 그건 과연 행복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아니다!’라는 선문답같은 깨달음을 주기보다는, ‘완벽한 나를 원한다는 건 어떤 걸까’, ‘그렇게 완벽해지면 행복해질까라는 물음, 그로 인해 관객 각자의 고민이 이루어진 다는 것, 그것 자체로 공감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름을 붙이다.

그가 작품을 만들면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인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줄 때다. “이름이 하나하나 붙여지고, 등장인물의 윤곽이 드러나면, 갑자기 없었던 이야기가 생겨나는 느낌이 들어요. 작품에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각각의 인물이 무슨 사연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왔을 거라는 상상을 하죠. 주연부터 조연까지, 심지어 악역으로 치부되는 인물도 저에겐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그 전사를 대본에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아요. 배역이라는 건 옷과 같아서, 어떤 배우가 입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기도 하더라고요.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요.” 때때로 작가는 신에 비유될 때가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적 시점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는 각 인물을 모두 관장하고 있다는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늘 조심한다. “더블 캐스팅으로 작품이 진행되면 인물의 다양함을 더 느끼게 돼요. 똑같은 직업을 가진, 같은 이름의, 같은 대사를 하는 인물인데도 서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것 처럼 느껴져요. 같은 혈액형을 가졌다고 해서, 특정한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 같은 성격을 가진 건 아니듯이 말이에요. 그렇게 전형적으로 소비되는 캐릭터가 되지 않으려면 배우가 인물을 직접 만나고 교감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캐릭터를 대할 때, ‘내가 이 인물의 엄마다라기보다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편이예요. 친구라고 했을 때 알 수 있는 딱 그 정도. 그 정도의 거리감을 두고 부화하기 전 알 상태의 캐릭터로 만들면, 캐릭터가 배우를 만나서 새가 되더라고요

 


 스스로 날 수 있는 새가 되기까지

우란문화재단도 조민형 작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었다. 조민형이라는 캐릭터를 재단의 무대 위에 올려주었지만,스스로 길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알이 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곳. “우란문화재단과 작업하면서 케냐 국립공원같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자연 그대로의 넓은 환경을 제공해주면서도 사냥꾼이 들어오지는 못하게 해주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런 면에서 조민형 작가와 우란문화재단은 많이 닮아있었다. 조민형 작가는 지금 또 다른 몽상을 하고 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의 자신을 만나보면 어떨까 하는. “청소년 시절에 본 뮤지컬들이 아직도 기억 나요. 그때의 감정이 아직 남아있어요. 되게 까칠한 시절이잖아요. 지금은 겉모습도 달라지고, 생각도 바뀌었지만 저는 그 시절의 제가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그때의 내가 다음 인형으로 씌워지는 거지 사라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안에 있을 뿐이죠. 지금 그때의 나를 만나면 굉장히 낯설 것 같은데, ‘그때의 나에게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싶은 것들을 지금의 청소년들과 나누고 싶어요. 그래서 언젠가 청소년 뮤지컬도 만들어보면 어떨까 꿈꿔보고 있어요.” 비록 어른이 된 그가 청소년들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더라도, 그의 말대로라면 공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공감은 이루어지는 거니까. 그가 청소년들과 나눌 다음 몽상은 어떨 것일지, 또 그렇게 나눈 몽상을 통해 아이들은 어떤 궤적을 그리며 날게 될 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