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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있는 빛, 마선영 조명디자이너





빛도 언어다. 명암과 컬러, 포커싱을 통해 빛이라는 시각적 언어를 만들어낸다. 정교하게 짜인 조명이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면 또 하나의 문법과 어휘, 뉘앙스가 작품에 생성된다. 지난 9월 17일과 18일,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에서 열린 <디어 마들렌>의 조명은 마선영 디자이너의 손을 거쳤다. 신분에 따라 먹는 빵까지 달랐던 시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빛이 무대를 채웠다. 18세기 파리를 밝히던 빛이 2021년의 서울로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디어 마들렌, 디어 라이트


마선영 디자이너와 우란문화재단의 인연은 이번이 네 번째다. 2016년 <나무 위의 고래>가 처음이었다. 이듬해엔 <순수의 시대>, 2020년엔 <새벽 세시>의 조명 디자이너로 우란문화재단의 프로젝트를 함께 했다. “조명 디자이너는 어느 정도 기획이 정립된 후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우란문화재단의 프로젝트에선 초반부터 참여하죠. 어떻게 무대 구성을 할지, 어느 시점에 어떤 대사와 음악이 나오는지 미리 파악할 수 있어요. 제작 단계를 전부 함께한다면 조명 디자인은 더욱 치밀해질 수밖에 없어요. 자유로운 의견 교환과 적극적인 제작 지원 역시 완성도를 뒷받침하고요.”


<디어 마들렌>의 배경은 불평등으로 인한 갈등이 폭발하던 근대 프랑스. 마선영 조명 디자이너는 당시 민중의 삶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가야 한다고 여겼다. 1800년대 파리는 어떤 불빛에 둘러싸여 있었는지 방대한 양의 사료를 조사했다. 신분에 따라 소비하는 식재료까지 달랐다면 ‘빛의 소유’ 역시 계층을 구분하는 척도가 될 것 같았다. “불평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빛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듯했어요. 화려한 샹들리에와 수북하게 늘어선 초는 상류층의 저택에서만 환하게 빛났을 테니까요. 객석의 구조 역시 중점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였어요. 여러 곳에 흩어진 관객이 같은 배우를 바라볼 텐데, 어떤 각도에서도 같은 효과를 내는 조명을 만들어내야 했죠.”



시간을 관통하는 빛, 어둠을 밀어내는 사유


주제 의식과 서사 구조에 완벽히 조응하는 조명 디자인은 <디어 마들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조명이 같은 극예술은 없기에 매번 새로우면서도 다단한 준비 과정을 거친다. 대본을 읽고 시대적, 공간적 상황을 조사하는 데 긴 시간을 할애한다. 만약 무대가 바닷가라면 계절에 따라 해당 지역의 일출과 일몰 시각까지 알아낼 정도다. 이후 여러 자료를 토대로 그가 추구하는 빛을 디자인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무대가 구성되면 직접 그 위에 올라 실제로 구현된 조명을 살핀다. 빛이 비치는 각도, 의상의 컬러, 미장센의 반사도 등 광선이 내려앉는 모든 것이 고려 대상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마침내 각 장면의 조명 디자인과 음악, 연출 의도까지 담긴 큐를 제작한다. 모든 과정을 합치면 짧으면 몇 개월, 길면 1년을 훌쩍 넘긴다. 간단치 않은 절차다. 그래서 ‘조명을 디자인한다’라는 표현은 이 장황한 프로세스를 넌지시 함축하기도 한다. 무언가를 직조하고 마름질하는 복잡한 과정의 집합이 디자인의 본질일 테니까. 


그는 조명 디자인의 시작 단계부터 끝까지 동반되어야 할 한 가지 요소를 첨언했다. “모든 작품은 추구하는 바가 있어요. 아무리 해박한 사람이라고 해도 각각의 작품이 내재한 방향성을 완벽하게 알고 있을 순 없죠. 그래서 다양한 시대와 문화를 들여다보며 편협하지 않은 시선을 갖추고자 해요.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평생 이어가야 할 공부 거리죠. 조명 역시 작품에 깃든 시대정신을 투사할 수 있다고 믿어요. 성공하기만 한다면 둘도 없이 빼어난 조명 디자인이 되겠죠. 제가 하고 싶은 작업도 그런 디자인이고요.”





그동안의 경험과 학습을 통해 쌓은 통찰은 지난날 맡은 작품에 대한 소회로 이어지기도 했다. 6년 전 참여한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보다 넓어진 지금의 시야로 다시 조명을 디자인하고 싶은 작품이다. 한편 <스위니 토드>를 작업할 땐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임했다. 그러나 픽션보다 더 끔찍한 현실의 사건을 꾸준히 접하면서 <스위니 토드>가 더는 픽션처럼 보이지 않았다. 전보다 과감한 태도로 더욱 현실적인 조명을 디자인할 방법이 떠오르곤 했다. 


아직 무대화 되지 않아 경험할 기회가 없었던 작품 중에선 인도 영화 <블랙>을 꼽았다. 시각장애인이자 8살 어린이인 주인공 미셸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던 중 선생님 사하이를 만나 벌어지는 일을 다룬 드라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자 욕심나는 작품이에요. 만약 뮤지컬이나 연극으로 각색된다면 꼭 조명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시각뿐만 아니라 마음마저도 불편한 아이가 좋은 스승을 만나 변해가는 이야기가 아직도 잊히지 않거든요. <블랙>은 주인공이 시각장애인인 만큼 조명 디자인이 큰 역할을 할 작품이기도 해요. 빛이라는 존재 자체를 캐릭터화할 수 있는 여지도 있고요.”



가장 치열한 성장


마선영 디자이너가 <블랙>을 좋아하는 이유는 성장이라는 키워드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시절 마임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중 처음으로 조명을 접한 후 지금까지 빛에 이끌리며 성장을 거듭했다. “원래 어문 계열로 대학에 진학했어요. 10대 때 경험한 조명을 진로와 연관 짓지는 못했거든요. 그즈음 사진도 배워보겠다며 학원에 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이후 모든 걸 그만두고 극장으로 가서 조명을 배웠어요. 그렇게 20대 초반을 보내고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해 조명 전공으로 새롭게 출발했죠. 그때가 24살이었어요.”


대학 졸업 후엔 드라마 센터에서 조명 담당 조교로 3년간 일했다. 어시스턴트와 소규모 공연의 조명 디자인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저변을 넓혔다. 하지만 규모 있는 공연의 조명 디자인을 할 기회를 접할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거절당했다. “학력을 묻길래 서울예대라고 답했더니 최종 학력이 무엇이냐고 묻더라고요. 유학 다녀오지 않은 디자이너와 한 번도 함께 일해본 적이 없다면서요. 그래서 다시는 같은 질문을 받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미국으로 갔어요. 그때가 서른 즈음이었어요.” 개인 SNS는 물론 홈페이지에도 드러내지 않지만, 그의 최종학력은 ‘그 다짐’으로 인해 뉴욕대학교 석사로 바뀌었다. 


귀국 후 전문 조명 디자이너가 된 그의 경력은 이제 약 7년이 되었다. 그 사이 <그리스>, <패왕별희>를 비롯한 대작을 여럿 소화했으며, ‘KINDLING’이라는 조명 디자인 솔루션 회사를 세우기도 했다. 최근엔 3D 환경에서의 조명 디자인 의뢰가 점점 많아지면서 새로운 툴을 도입하고 연구하는 데 한창이다. 또한 점점 변모하는 공연 예술 시장에 대응할 수 있도록 사내 시스템을 새롭게 정비하는 데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도 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일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에게 건넨 마지막 질문은 사전에 예고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소 추상적이지만, 빛이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마선영 디자이너에게 꼭 묻고 싶었다. “일을 떠나 제 삶을 긍정적으로 바꿔 놓았어요. 어릴 때 별명이 거북이였어요. 말과 행동, 선택까지 전부 느렸거든요. 그런데 조명 디자이너가 되고 나니까 타인과 소통하는 능력, 위기에 대처하는 순발력, 반복되는 위기에 굴복하지 않는 지구력까지 필요하더라고요. 저처럼 내성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일을 하려니까 여러 면에서 난관에 봉착하곤 했어요. 솔직히 후회한 적도 많아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본래 성품을 이겨내려고 하고, 문제를 직시하다 보니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빛에 매료되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기쁨이죠.”

글: 이재현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