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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동네>의 트라이아웃 쇼케이스를 2주 앞두고 강남 작가를 만났다. 지난 6년여간 품어온 대본을 새로운 이야기를 대하듯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시작된 하루라고 했다. 2017년, 강남 작가는 예술가로서 사고를 기록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다종다양한 비극이 있고, 그 역사는 갱신되고 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관한 작품을 작업하는 그는 “왜 체르노빌이야?”라는 질문을 자주 받아왔다고 했다. 그 질문 속에는 “왜 서울에서 7,260km나 떨어진 동네 프리피아트 이야기야?”라는 속뜻도 포함되어 있을 테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강한 신념이라든가 사명감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시작한 게 아니에요. 알려져야 할 이야기를 회자시키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자는 게 목표입니다.”라는 답을 돌려준다.
지금, 다 같이 체르노빌을 읽는 일
강남 작가는 무대 위에 <동네>를 올리기까지 방대한 양의 기사, 다큐멘터리, 논문, 보고서, 책 등을 통해 수없이 되풀이되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관한 기록을 꾸준히 접했다. 실화 기반으로 제작된 HBO 드라마 <체르노빌>도 챙겨 보았다. 그는 같은 소재를 두고 드라마가 할 수 있는 일과 무대가 할 수 있는 일의 차이를 고민했다. 동시에, “사고에 대해 남겨진 기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우크라이나 저널리스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얻었다. 이 책은 100여 명의 사고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담긴 인터뷰집으로, <동네>의 ‘2장. 소방관과 아내’의 주요한 참조점이 되었다. 그는 사건·사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그 실상이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일이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일이라고 느꼈다.
“100여 명의 소방관이 출동했고 이들 중 29명이 피폭되어 사망. 이후 사고의 수습을 위해 약 22만 6천 명의 해체 작업자들, 60만 명의 예비군과 현역 군인이 투입되었다.” <동네>의 ‘1장. 기록하는 목소리'와 ‘6장. 기억하는 목소리’에서는 동일한 숫자들이 대사 한 줄 한 줄이 되고, 감정을 배제한 배우들의 목소리로 총 두 번 읽힌다. 그가 고전 시가(詩歌)에서 첫 연을 끝 연에 다시 반복하는 식의 수미쌍관 기법을 도입한 건,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숫자를 무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방법을 고민한 결과다. 각각의 숫자에 이름과 역사를 부여하고 나면, 처음에는 정확히 크기와 규모가 체감되지 못했던 숫자들이 6장에 가서 비로소 다르게 다가올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재난을 소재로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로서 그가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은 건 “실존하는 인물들의 감정을 흉내 내지 않는 것”이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없앨 수 있는 ‘블랙박스'(black-box) 극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배우가 관객들을 향해 실화를 실감 나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데에 있는 ‘실감’의 한계를 짚는다. <동네>에서 배우가 가진 의무는 자신이 아는 것을 전달하는 게 아닌, 관객들과 밀착해서 함께 이야기를 읽는 데에 있다. “다 같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함께 같은 걸 목격할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의도를 살리기 위해, 관객의 자리를 외부석과 내부석으로 이분할 하고 무대 곳곳에 큐브가 널려 있는 유연한 좌석 배치를 취했다. 관객들은 사이렌 소리를 배경 삼아 무대 안팎을 뛰어다니는 동네 사람들의 규칙적인 발소리를 몸으로 듣게 된다. 그는 이러한 배치가 제작진 모두에게 도전에 가까웠다고 하면서도, “의도한 것과 전달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높은 산 같은 무대 위, 지도를 만드는 사람
강남 작가와 우란문화재단의 인연은 2017년 뮤지컬 <차미>부터 이어진다. 그는 <차미>에 조연출로 참여하는 동시에 <동네>의 대본 작업을 시작했고, 공연예술창작산실 대본 공모 리딩을 지나 우란이상 프로그램을 통해 작품개발을 해나갔다. 그동안 ‘나라는 사람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끈질기게 고민해 온 6년의 시간이 쌓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 우란문화재단은 “창작자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것을 함께 고민해줄 수 있는 좋은 동료들을 만나게 해주는 장”이다.
그의 오랜 동료인 김효은 작곡가와의 합도 빼놓을 수 없다.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뮤지컬 <검은 사제들>에 이어 김효은 작곡가와는 세 번째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예그린뮤지컬어워드, 한국뮤지컬어워즈 등 2019년도 국내 뮤지컬 시상식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그들의 파트너십은 작품을 위한 싸움 속에서 다져졌다. “가사를 쓰는 저와 음악을 쓰는 상대방이 만나 하나의 넘버를 만드는 데 마음이 같을 수는 없어요.” 그들은 끊임없이 대화하며 서로의 미완성 작업물이 가지고 있는 허점을 발견하는 사이다. 이런 대화의 시간이 쌓이면서, 그에게는 좋은 파트너의 조건 중 하나가 싸울 수 있는 파트너라는 기준이 생겼다. “원래 <동네>는 연극을 염두에 두고 만든 대본이었어요. 어느 날 작업 중인 대본을 김효은 작곡가님께 살짝 보여주었더니 뮤지컬로 개발해봤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뮤지컬 <동네>는 그의 믿을만한 파트너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강남 작가는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 조연출 시절, 좋은 이야기가 좋은 음악을 만나는 일의 기쁨을 알게 됐다. 조연출과 작가로서의 이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 그는, 기본적으로 두 역할 모두 산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과도 같다고 말한다. “조연출이 아무도 가지 않은 산으로 향하는 등산가라면, 작가는 하산할 때까지 모두가 길을 잃지 않도록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에 가까운 것 같아요.” 다만, 조연출은 대본을 포함한 공연 전체 과정은 물론이고 제작진과 배우들이 눈앞의 산을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을지 컨디션까지 파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 같이 산 넘고 물을 건너며 공연을 완성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른 점은 없지만, 그는 조연출보다 작가로 있을 때 조금 더 사뿐하게 발걸음이 움직인다는 기분을 느낀다. 그가 2022년에 가장 많이 들은 음악은 장기하 솔로 EP [공중부양]의 타이틀곡 ‘부럽지가 않어’다. “‘부럽지가 않어'를 부르는 장기하가 부럽더라고요. 작가이자, 연출가이자, 배우이자, 모든 역할을 혼자 다 해내는 사람을 보는 즐거움이 있어요." 어쩌면 그에게 있어 아티스트 장기하는 등산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현재의 그는 지도를 만드는 자신의 일을 좋아한다. 지도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목적지에 빨리 닿는 것보다 길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과정을 함께해주는 관객들이 우리 작품이 나아갈 다음 경로를 만들어준다고 믿어요."
그는 늘 자신의 주변에 있는 존재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호프> 재연을 앞둔 한 인터뷰에서 “언젠가 반려동물에 대한 뮤지컬을 만들어보고 싶다”던 그는 <동네>에서 평생을 살아온 고향에 홀로 남겨진 강아지 ‘마루’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임시 피난인 줄로만 알았던 주민들이 반려동물을 그대로 둔 채 떠났을 때, 반려동물들은 남겨진 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거나 죽음을 맞이한다. <동네>는 다시는 재발하지 않아야 할 사고를 겪은 사람들뿐 아니라 언제나 그들 주변에서 살고 있던 생명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로서는 미처 다 알 수 없음에도 동물의 시선을 담고자 했어요. 재난의 여파가 단지 인간의 삶에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니까요." 강남 작가가 무대 위에 펼쳐놓은 지도는 여기서부터 7,260km나 떨어진 곳까지 관객을 데려다 놓았다. 더 많은 관객들이 그의 가이드를 받을 수 있도록, 머지않아 <동네>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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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해인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