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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대화하기, 김민조 드라마터그





최근 우리 존재를 추동하는 힘은 ‘느슨한 연결’이다. 여러 사람이 끈끈하게 엮여 높은 강도로 공동의 목표를 완수하는 건 더이상 미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구성원 개개인의 의견이 각자의 색깔대로 존중받을 수 있을 때 최소한의 평화가 보장된다. 연극의 세계도 다르지 않다. “하나의 공연은 텍스트, 퍼포먼스, 연출, 디자인, 오퍼레이팅 등 각 분야를 전담하는 예술가들의 분업 체계에 의해 생산"되어 왔으므로. 그래서 극작가 동인 ‘괄호'의 공동극작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더욱 궁금했다. 괄호(김민조, 김진희, 도은, 신효진, 이소연)는 2022년 2월부터 9월까지 우란이상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네 가지 유형의 함께쓰기 실험 과정을 아카이빙북 <함께-쓰기-지도>로 엮었다. 그들도 한때는 느슨했다. 점차 끈끈해지는 가운데에는 시행착오가 있었다. 김민조 드라마터그와 괄호의 지난 프로젝트를 돌아보는 일련의 대화를 나누었다. 






드라마터그: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찾아서


김민조 드라마터그는 우란문화재단 레지던시에 입주한 후 2022년 5월, 재단과의 인터뷰에서 이미 자신의 직업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그는 ‘드라마터그’라는 직군이 낯선 사람들을 위해,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모더레이터’에 자신의 일을 빗댔다. 이 작업은 마주하는 사람들을 “‘액터(Actor)’와 ‘리액터(Re-Actor)’로 쪼개는 것"부터 출발한다. 그는 창작하는 모든 이들을 ‘액터'로, 그들의 활동에 반응하는 이들을 ‘리액터'로 간주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배우는 액터이지만 동시에 리액터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연습실에서 배우 A가 연기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배우 B가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리액션을 해줄 수 있잖아요. 한 사람에게 하나의 역할이 고정된 게 아니라, 각각의 기능을 그때그때 번갈아 가며 수행합니다. 드라마터그의 주요한 역할은 매번 달라지는 액터와 리액터 사이를 중개하는 거예요.


연습실에는 다수의 구성원이 있다. 그들 사이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있도록 적절한 타이밍에 알맞은 화제를 던지는 게 그의 몫이다. 언제나 다수 사이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김민조는 대화하는 직업인이다. 유창한 화술을 가졌거나 목소리가 큰 사람의 말이 더 멀리 퍼져 나가곤 하는 요즘, 그에게 좋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정의를 구했다.


좋은 커뮤니케이션은 경계를 넘어서는 거예요. 연습실에 있는 배우는 자신이 배우로서 말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걸 이야기합니다. 같은 이유로 작품의 연출이나 기획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게 되고요. 우리는 소위 ‘아무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해요. 하지만 때로는 경계 안쪽에 머무르지 않고 아무 말을 나누어야 해요.


이어서, 김민조는 예술계에 ‘민주적인 의사소통에 대한 양가감정’이 만연하다는 점을 짚는다. 예술가 개개인이 모여 협업할 때 ‘실은 내 의견이 더 옳은데'라는 마음이 싹트는 게 한없이 자연스럽다는 것. 이러한 마음이 생기더라도 사람들은 수면 위에 자신의 마음을 꺼내 올리지 않는다. “이 장면은 이렇게 바꾸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하기가 가장 어려운 의사소통이 되는 이유다.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민주적인 말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수면 위로 올리는 일 자체가 고난도로 느껴지는 거죠.”

 

문득, 대화 현장에 그와 함께 있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다섯 명의 동인이 각자 20%의 지분을 나누어 가지고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경계를 넘어서면서도 평등하게 이루어지는 대화는 기계적으로 발언량을 맞춘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괄호 동인들도 처음에는 이런 식의 말하기 방식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필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계속 함께 대화해야만 알 수 있는 게 있어요. 철저하게 경험의 영역입니다.” 



<함께-쓰기-지도> 아카이빙북 



<함께-쓰기-지도>: 작법서 또는 시민을 위한 교양서


총 4부로 구성된 <함께-쓰기-지도>는 ‘2부. {느슨하게} {또는 이어서} 함께 쓰시오’와 ‘3부. {끈끈하게} {또는 동시에} 함께 쓰시오’를 중심으로 괄호가 시도해 온 공동극작의 유형과 사례가 정리되어 있다. 3부는 우란문화재단 레지던시 입주 이후를 다룬다.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이 느슨한 협업 구조에서 긴밀한 협업 구조로 이행한 과정이 보인다. “공동극작을 하는 도중에는 힘들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해본 적이 없는 종류의 작업이니까요.” 괄호는 엄청나게 오랫동안 회의를 하면서, 모든 동인이 동의할 수 있는 서사, 장면, 인물을 찾아갔다.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무척이나 더디게 느껴지는 날들도 있었다. 


이들이 과연 <함께-쓰기-지도>의 4부 같은 결말을 예상했는지 궁금했다. 이 책의 4부에 수록된 <다른 부영>(가제)는 괄호가 우란이상 프로그램에서 최종 시도했던 프로젝트로, 2~3부에 서술한 네 가지 유형이 조금씩 뒤섞인 버전처럼 보인다. 이들의 목표는 여러 차례 실험을 거듭한 끝에 가장 이상적인 유형을 찾는 것이었다. 


❝이상적인 공동극작 모델을 개발하는 데에 실패했고, 사실상 그런 건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어요. 그래서 다들 불안함을 안고 <다른 부영>(가제) 내부 리딩을 진행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리딩을 하고 나니 이게 하나의 작품으로 읽힌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우리가 지나온 삐뚤빼뚤한 과정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고요.❞


김민조는 공동극작을 하면서 ‘기회비용'을 셈하는 일에 대해 짚는다. 모든 극작가에게는 동일한 시간이 주어지는데, 그들이 ‘내가 이 시간에 혼자 작업했더라면 몇 편의 각본은 더 쓸 수 있었을 텐데’라는 속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우란이상 프로그램은 ‘과정 실험'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다. 당장의 성과와는 무관하게 쓰고 싶은 걸 쓰고 싶은 형태로 쓰기. 동시에, 자신들의 실험을 간섭받지 않으면서도 실험을 완주하도록 부추김을 받기. 그가 젊은 창작자들을 위해 가장 높은 우선순위로 꼽는 ‘과정 실험'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을 청했다.


❝젊은 창작자일수록 빨리 업계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결과물을 내는 데 급급할 수 있어요. 모든 프로젝트가 눈에 보이는 결과를 향해 수렴되어야 한다는 강박이고, 번듯한 결과물을 내놓고 싶다는 증명 욕구이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게 결과라면 굳이 실험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찾아가야 해요.


과정이 중요하다고 믿어온 괄호의 동인들이 재단과의 프로젝트를 마치며 나눈 감각은 성취감이다. 다음 시도로 이어지는 작은 성취감. 이 시간을 통해 괄호의 구호 '극작가가 소외되지 않는 프로덕션' 또한 이전보다 더욱 선명해졌다. 그들은 극작가가 프로덕션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익힐 수 있게 됐다. 자신이 점하는 위치와 권리에 대해 이전보다 예민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 한편, 김민조는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자아를 분명히 지켜나가는 괄호 동인들을 보면서 내심 '지금보다 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번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 저는 제 안에 있는 구시대적인 정서를 발견했어요. 격의 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친해지는 걸 중시하는,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야만 일이 잘된다는 생각이 만연하던 시대가 있었잖아요. 하지만 극작가들은 개인 사업자들이에요. 각자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의 세계를 만들 때는, 개인이 지닌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고요.❞


천천히 공동의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동안 그는 자신의 조급함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가 일을 대하는 관점이 달라졌던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이야기는 누구에게 닿을 수 있을까. 괄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층은 공동극작을 꿈꾸는 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함께-쓰기-지도>를 일상 시민을 위한 교양서라고도 정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저에게는 집안일도 공동창작이에요. 두 사람 이상이 같이 살 때, 각자의 개성이나 고유성을 존중하고 지켜줘야 하니까요.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은 데다가 갈등의 소지를 가지고 있어요. 여기에서 어떻게 서로 미워하지 않으면서 갈등을 다룰 수 있을 것이냐는 질문이 남고요. 그런 질문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이 책을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읽는 사람의 다음: 퀴어 연극 아카이브, 비평적 픽션


함께 대화하고 함께 각본 작업을 하지 않을 때, 김민조는 혼자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트위터를 하거나 유튜브를 봐요. 권태로운 대학원을 빨리 졸업하고 싶다고 종종 생각하고요.” 최근 즐겨 읽었다는 세 권의 책은 2022년의 그가 사로잡혀 있는 화두를 비춘다. 여성, 장애, 퀴어를 단일한 쟁점으로 대하는 대신 교차적으로 바라보자고 짚는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 인간 중심적인 태도에 익숙한 이들이 대상화 없이 대상을 대하는 방식을 제안하는 이언 보고스트의 <에일리언 현상학>. 


이중 그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은 독립 연구자 사라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이다. 행복해질 수 있는 법과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법을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 ‘행복은 언제나 좋은가?'라는 질문은 낯설다. 그는 최근 연극을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 불행에 천착하는 모습을 본다. 다만, 불행을 조금 더 차분하게 탐사하는 시선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느낀다.


❝저는 불행이라는 게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폭넓게 공유될 수 있는 감각의 지대라고 생각해요. 불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서로를 더 가깝게 느끼기도 하니까요. <행복의 약속>은 ‘행복은 좋고 불행은 나쁘다’는 이분법을 떠나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희곡을 볼 때 문체를 가장 중요시한다는 그는 최근 에세이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를 펴냈고, 주간 문학동네에서 <나는 왜 이렇게 웃긴가>를 연재 중인 이반지하의 글을 즐겨본다. “당사자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가지고 노는 그의 글을 좋아해요. 퀴어이지만 가끔 퀴어이고, 비건이지만 조금 비건인 방식으로요.” 그는 이반지하의 글을 읽는 내내 활달함과 유연함을 맛본다.






읽는 사람 김민조의 인풋이 어떤 아웃풋을 가져올지 궁금해하는 마음으로 근미래의 작업 계획을 물었다. 동시대의 퀴어와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 관심을 두고 있는 그는 현재 ‘한국 퀴어 연극 아카이빙 작업’을 구상 중이다. 아카이빙북 <함께-쓰기-지도>에 이어 다시 한번 이러한 형태의 작업이 예견된 이유는 아카이빙이 담론을 만들기 때문이다. 담론이 만들어지면 창작에도 동력이 생긴다. 


연극 비평가가 되기 전의 김민조는 비평의 대상으로 문학과 연극 사이에서 고민하는 시기를 보냈으며, 그전에는 창작자가 되고 싶어 시나 소설을 습작했다. 최근의 그는 ‘비평적 픽션'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비평을 택했으니 결국 창작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왔는데요. 요즘 다른 창작자들의 작업을 보면 글쓰기의 경계 자체가 많이 무너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는 새로운 시도를 모색한다. 예술과 사회에 대해 비평적인 기능을 해내는 소설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에서 굴린다.


❝제가 쓰는 픽션에는 지원 사업에 응모된 지원서들을 검토하면서 심사위원들이 나누는 대화가 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시놉시스를 놓고서 ‘왜 이것은 매력적이고 저것은 아쉽다고 느껴지는가’에 관한 장면이 될지도요. 어쩌면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말들로 이루어진 글이 되겠죠.❞



김민조 드라마터그는 괄호의 일원으로서 함께 하는 일에 대해 시종일관 강한 비전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울타리를 조금만 벗어나 보면 강하고 긴밀한 비전을 공유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과연 느슨하다가도 끈끈한 협업의 경험은 그가 사회에서 일반 시민으로 사는 데에도 도움이 될까. “100% 도움이 되고 있어요.” 언젠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확신이 필요해지는 순간이면, 주저함이라고는 없었던 그의 답변을 떠올릴 것이다.


글. 서해인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