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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함에서 부드러움으로, 김경찬 작가






“제주에서 제주 점토로 도자기 작업을 하는 사람." 김경찬 작가의 자기소개는 간결하다. 출생부터 현재까지가 모두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제주 점토'는 석사 논문 주제였고, 그는 맥을 찾아 직접 제주만의 독특한 흙을 채취했으며, 그것을 도자기를 만드는 기본 재료로 삼을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에 꼬박 3년을 보냈다. 젊은 예술가가 흙에 고개를 파묻는 고독한 시간을 낭만적으로 바라보기는 쉽다. 그러나 쉬운 길을 가지 않는 그를 향해 사람들은 진심과 우려가 조금씩 섞여든 관심을 보였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김경찬 작가와의 이야기는 자신을 ‘엄청나게 많은 이파리를 들여다보는 게 직업’이라고 소개한 과학자 ‘호프 자런’과 그가 둘도 없는 동료를 만나게 된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 센트럴 밸리 곳곳에서 석사 과정 중 하나로 토양 기록 작업을 하던 호프는 마치 금이라도 찾는 듯 열심히 구덩이를 파고 흙을 들여다보던 을 만난다. 구덩이에서 고개를 든 ‘빌’은 호프를 향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누구나 자기도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는 별 이상한 짓을 할 때가 있잖아. 단지 아는 건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뿐인 거고.”¹





오브제에서 찾아낸 쓸모

2022년 우란이상 <흙의 변이 Nature-Made> 연구전시 프로젝트는 우란문화재단 소장품인 김창호 작가의 질그릇에서 시작되었다. 김창호 작가가 제안한 키워드 ‘생성'과 ‘존재'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3인의 작가(김경찬, 김창호, 정김도원)가 염두에 둘 공통의 키워드가 됐다. “김창호 작가는 연륜 있는 장인이면서도 오히려 저보다 더 깨어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내가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할지는 나도 모른다.’ 하고 스스로 국한을 두지 않는 태도가 인상 깊었어요.” 김경찬 작가는 이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키워드를 그가 줄곧 품고 있었던 키워드인 ‘쓰임'과 연결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쓰임에 대해 생각한 건 도자기가 오브제에만 머물러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어요. 제가 이제까지 해 온 작업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오브제를 쓰임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도자기가 오브제라는 사실을 없애고 싶은 건 아니고요. 도자기가 지닌 두 가지 속성은 선이 그어진 채로 공존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였습니다.




《흙의 변이 Nature-Made》 연구전시 中 (사진 김경태)



전시 공간은 흙이 도자기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가마’를 모티브로 삼았고, 그 중 일부 구간에는 작가들이 실험했던 흔적과 과정을 모아두었다. 그곳에 놓여 있는 작은 조각들은 도자기가 완성되기 직전의 무엇이면서 때로는 완성과는 무관한 것이기도 했다. <흙의 변이 Nature-Made> 공간을 담당한 최무규 건축가는 참여 작가들에게 “경이로운 순간을 홀로 마주하는 작가의 복잡한 심경을 전달하고 싶다"는 의도를 공유했다. 김경찬 작가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최무규 건축가 님의 기획 의도를 듣고 일단 ‘재미있겠는데?’ 라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협업은 제가 가지지 못한 시선을 가지고 있고, 저와 비슷한 마음을 다르게 표현해줄 수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이에요.


그가 가마 앞에서 보내는 날들은 가능성을 셈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화산 폭발 후 재가 땅으로 스며들면서 생긴 ‘화산 회토’는 일반적으로 질그릇이나 도자기를 만드는 데에 쓰이는 재료가 아니다. 승률이 적은 게임에 뛰어들면 사람은 심란해진다. 그런데도 몰두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궁금했다.


‘3년 안에 제주 점토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만 해!’라는 요구가 있었다면 시작도 안 했을 거예요. 처음은 막연했어요. 될지 안될지 잘 모르겠지만, 자문을 구할 교수님을 만나고, 책을 들춰보고, 맥을 찾아가 보는 일상이었어요. 제주 점토는 한마디로 단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재료인데요.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단점을 보완하다 보니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 있었던 것뿐이죠.





그는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로운 재료를 가지고 오름의 능선처럼 이어지며 부드러움이 강조되는 결과물을 빚어낸다. 이 점이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많은 사람이 ‘옹기'라고 하면 장독대, 항아리가 가진 투박함부터 떠올린다는 걸 알고 있다.

제가 처음 흙을 할 때, 교수님이 지나가듯이 던진 말씀이 있어요. 제주 점토는 백자의 도토보다 입자가 고와서 더 치밀하게 만들 수 있는 재료라는 거였죠. 저는 작업 과정이 치밀하고 고될지 모른다는 것보다, 재료가 섬세하다는 점에 꽂혔던 것 같아요. 재료가 섬세하면 완성품에서 투박함이 사라질 것 같았어요. 그걸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부드러운 결과물이 되겠네요.


그의 작업실에서는 오름이 보인다고 한다. 타지인에게는 찾아가야 할 관광지이지만, 토착민에게는 일상적인 풍경의 일부다. 오름과 김경찬 작가는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 평소 제주와 서울을 한 달에 한두 번 오가며, 나머지 시간은 집과 작업실로 오가는 그는 제주도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이들을 향해 여러 번 손으로 그려 넣었을 지도를 이번에도 공중에 그려 보였다. “제주도가 이렇게 있으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희집은 이쪽 해안가에 있어요. 해안가 지역에 산다고 제주 바다에 자주 가는 건 아니고요.” 그는 마찬가지로 멀리서 바라볼 뿐 오름에 자주 찾아가지는 않는다.

집부터 작업실까지 운전하면 30분이 걸리거든요. 창밖을 보면, 한라산부터 능선들이 다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어요.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능선의 끄트머리만 보이는데 거기에 항상 있구나 싶죠. 오름의 능선은 제가 작업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대상이에요. 제주 점토라는 재료를 만나게 돼서 가능했어요.



김경찬, <COSMO-Orumm> 2022, 제주점토에 소라, 전복 껍데기, 해조류, 현무암, 톱밥 (사진 김경태) 



<흙의 변이 Nature-Made>에서 소라 껍데기, 전복 껍데기, 해조류 등 작업실 근처에서 주운 재료들을 작품에 녹여내었던 그는 요즘 돌이 재미있다고 했다. 종류가 다양한 돌은 소성 온도(도자기를 굽는 온도)가 각각 다르다. 한라산이 폭발하면서 터져 나온 재와 그때 튀어나온 돌의 온도는 비슷했을 테고, 현재의 그는 소성 온도가 비슷할 재, 흙, 돌이 자기 안의 영감과 만나 어떤 작업이 될 수 있을지를 두고 보는 중이다. 



규격화된 이미지에서 빠져 나오기 


2022년 연말에 개최한 우란시선 <밤이 선생이다>는 5명/팀(김경찬, 박성극, 오마 스페이스, 조덕현, 조성연)이 함께 하는 전시다. 작가들은 우리 선조가 술을 대하는 태도를 살피고 지금의 술 문화를 각자의 방식으로 돌아보며 앞으로 전승해 나가야 할 것들을 제안한다. 전시를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 중 콘셉트를 잡고 스케치 하는 단계에 가장 흥미를 가지고 있는 그에게 재단과의 작업은 자유로우면서도 명확해지는 시간이다. 그는 재단의 기획자들로부터 여러 질문을 받을수록,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를 더 잘 알게 된다고 한다. 김경찬 작가가 이어가고 싶은 건 쉽게 연상하기 쉬운 이미지를 벗어나는 ‘다양성’이다. 


사극을 보면 집마다 술을 양조하고 그걸 양반을 대접하기 위해 멋들어진 주안상으로 내어놓잖아요. 지금은 차림부터 술이 담긴 병과 잔까지 한결 가벼워졌죠. 그런데 오늘날의 술자리는 어떤 이미지에 갇혀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어떤 술을 마신다고 할 때, 우리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건 규격화된 소주잔의 용량이잖아요. 그걸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전통 속에는 정말 다양한 크기와 다양한 질감을 가진 술잔들이 있었는데도요.



김경찬, <cosmo-오름 시리즈>, 2022, 제주 점토
김경찬, <cosmo-원샷 시리즈>, 2022, 제주 점토



그가 제주의 화산회토로 만든 <cosmo-원샷 시리즈>는 술의 맛과 향, 그것이 어떻게 양조 되었는가만큼이나 ‘쓰임새가 좋은 술잔’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준다. 전통주를 빚을 때만 손맛이 있는 게 아니다. 그에 따르면 술을 마시는 사람마다 각자의 손맛을 느낄 수 있다.


손맛은 함께 술을 마시는 동행인과의 소통이고, 혼자 마시는 자리라고 한다면 이 술을 만든 사람과의 소통이기도 해요. 물론, 규격화된 소주잔을 넘어서자는 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술을 즐기시는 분들이 잔을 손에 쥘 때의 감각, 그리고 그 잔에 얼마나 많고 적은 용량의 술이 담길 수 있는가를 다양하게 알아갔으면 해요.


옹기의 쓰임에 대한 그의 고민은 <흙의 변이 Nature-Made>부터 <밤이 선생이다>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의 고민이 깊어지는 건,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옹기를 들어보고 만져보는 학습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것. 도예가로서 느끼는 이러한 괴리감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쓰임이 중요합니다!’라고 작가가 외치는 것보다는, 최대한 많은 분이 제가 만든 것들을 통해 직접 술을 따르고 마셔보는 쪽이 훨씬 더 좋겠죠. 눈으로만 보기보다는 잔을 들어서 각도를 다양하게 살펴보고 관람객이 쓰임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전시적 시도를 언젠가는 해보고 싶어요. 구체적인 방법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아요.





<밤이 선생이다>에 참여한 작가들이 정의하는 밤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시간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모든 걸 잊어버리고 잠에 빠져드는 시간이다. 한때 가마에 불을 때고 밤을 새우며 작업을 하기도 했던 김경찬 작가는 작업실을 빠져나오는 7시부터 밤을 정의한다. 출근길에는 오름의 능선이 보이는 그곳이 퇴근길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작업실부터 집까지 운전하며 돌아가는 동안 내일을 계획한다. 


그리고 관객들이 바라보는 또 다른 밤이 있다. 전시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오마 스페이스의 ‘유포리아(Euphoria)’와 김경찬, 박성극 작가의 작품들이 함께 설치되어 있다. 거대한 삼베 스크린 위로 붉은 칠면초가 흔들리는 영상이 투과되고, 그 사이로 잔잔하게 흔들리는 제주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내부에는 시차를 두고 불이 들어오는 핀 조명이 김경찬, 박성극 작가의 작품을 비춰준다. 


제가 만든 옹기지만 제 것이 아닌 걸 본 기분이었어요. 어떤 전시 공간에 입장하면 동선이 정해져 있는 듯한 인상을 받을 때가 있잖아요. ‘이거 좋다’ 하고 그럼 ‘저기로 가볼까?' 하고 지나쳐 가듯이요. <밤이 선생이다>는 여기서 저기로 가는 동선보다도, 여기에 머물러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 전시에 가까워요. 집중이 가능하고, 눈앞에 있는 걸 좀 더 깊숙이 바라볼 수도 있고요.


밤하늘 아래 술과 함께 거니는 산책길. 선조들이 머무르며 술을 마셨을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전시장은 우리에게 밤의 시간만이 알려줄 수 있는 걸 보여준다. ”나홀로 또는 누군가와 같이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위안의 시간”을  제안하는 김경찬 작가는 올 해도 옹기와 오름을 연계한 <cosmo> 시리즈 작업을 지속할 계획이다. 제주에서 제주 점토로 도자기 작업을 하는 사람은 오늘도 오기를 넘어 부드러움으로, 부드러움을 넘어 유연한 상상력으로 빠져든다.


 


 

☑️ 김경찬의 구간점프

과거의 어느 날 보았지만 언제든 시간의 흐름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란피플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인생작을 소개합니다.

 


 


영화 <타이타닉>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개봉 당시인 중학교 때였어요. 사실 처음에는 제목만 듣고 전쟁 영화인 줄 알았어요. “타이탄?”하고 제목을 잘못 들었던 것 같기도 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분한 ‘잭’은 자유로운 화가 그 자체잖아요. 직업도, 상황도 다르지만, 도자기를 하는 저도 ‘잭’처럼 무언가에 국한되지 않은 삶을 살고 싶어요. 올해가 <타이타닉>의 개봉 25주년이라는데, 요즘도 잊을 만하면 종종 다시 보고 있습니다. “전 필요한 건 다 가졌어요. 제가 숨 쉴 공기와 그림 그릴 종이도 있죠."라는 주인공의 말과 태도가 조금씩 달리 보이는 것 같아요. 2022년에 <흙의 변이 Nature-Made>를 준비하면서 저보다 경험이 많은 김창호 작가님과 나눈 대화에서 받았던 인상도 비슷해요. 결국, 무언가로부터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도예가로서 살고 싶은 게 제 바람입니다. 


 


 


¹호프 자런 <랩 걸>, p.91




글. 서해인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