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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극의 반대쪽으로, 권지휘 음향디자이너







연주를 위해 주어진 시간 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음으로써 ‘4분 33초’의 작곡가가 된 존 케이지. 어느 날, 뉴욕 맨해튼의 번잡한 대로변에 있는 존 케이지의 집에 록밴드 갤럭시 500의 멤버 ‘데이먼 크루코프스키’가 방문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작곡 중인 집주인을 보며 손님이 의아해하자, 존 케이지가 이렇게 답변했다는 일화가 있다. “저는 창문을 절대 닫지 않습니다. 닫기는 왜 닫겠어요? 언제나 들을 것이 넘쳐나는데요.” 그에게는 거리의 버스 소리, 경적 소리, 사람들의 고성이 모두 말 그대로 들어야 할 소리였던 것이다. 


대학로에 있는 권지휘 음향디자이너의 사무실로 향하는 동안 존 케이지와 데이먼 크루코프스키가 나누었다는 대화를 떠올렸다. 여느 날과 달리 이어폰 없이 보행하며 무방비하게 들려오는 온갖 소리를 들었다. 세상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경청할 조건을 그리 쉽사리 내어주지 않는다. 옆 테이블에서 번져오는 소음,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 자꾸만 주어지는 마이크, 대화를 방해하는 배경음악들 속에서 우리는 잘 들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잘 들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보편적인 이야기와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도록


극공연 전문 음향디자인 회사 ‘미스터 어쿠스틱스’를 운영하고, 지금까지 120여 작품을 작업한 음향디자이너 권지휘. ‘미스터 어쿠스틱스’ 공식 홈페이지 속 “우리가 누리는 모든 편의에는 언제나 타인의 노고가 포함되어 있다"라는 사명은 여러 번 다시 쓰여왔다고 했다. 그가 이 구호를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건 배우와 연출가를 서포트하는 입장으로서의 ‘노고'가 아니었을까?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극공연 분야 종사자들의 직업적 특성이 어느 하나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집중하고 파고드는 건데요. 그래야만 나름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보편적인 사고방식에서 자꾸만 멀어지게 되더라고요. 집중할수록 애착이 생기지만, 과연 우리가 하는 일에 인류 전체를 관통하는 규범이나 도덕이 잘 어우러져 있나 싶을 때가 있어요. 현장에서 그런 부분을 놓치고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의 답변 속에서는 오히려 ‘타인'이 더 중요하게 들렸다. 그는 음향디자이너의 일을 “1차 창작진의 상상을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작가와 작곡가가 고안한 창작물에 연출가가 무대에서 구현되길 바라는 그림을 덧대어가면서 방향을 잡는다.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이어지는가 싶을 때, 음향디자이너를 포함한 테크니컬 파트에서는 현실적인 지점을 고려해 균형을 맞춘다. “이 부분은 구현하기 어렵습니다"라며 아쉬운 답변을 해야 하는 때도 종종 있다는 것. 그러나, 그는 최대한 타인의 상상력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실현할 수 있는 방식을 찾으며 지금까지 나아왔다. “제가 기술적으로 시도하며 쌓아 온 데이터베이스에 대해 지나친 확신을 가지려고 하지 않아요. 남겨진 가능성을 늘 믿고 있어요.






홈페이지에서는 음향 작업에 대한 그의 짧은 메모를 볼 수 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곳에 메모장 또는 수첩을 두고서 떠오르는 바를 적는데, 오래도록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질문은 다름 아닌 “좋은 음향이란 무엇인가?”이다. 극공연 종사자가 극공연을 관람하면 실수가 눈에 더 잘 보인다. 그래서 비판하기도 쉽다. 그는 모든 직업인이 자기 분야에서 경력이 쌓일수록 타인의 작업물을 두고 평가하는 속도가 빨라진다고 말한다. 습관적인 평가에 저항하기 위해 그가 택한 방식은 마음속의 물음표를 건설적인 질문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공연에서 작은 음향 사고가 있었거나 배우의 톤이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 누구나 ‘오늘은 음향이 별로였어'라는 인상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런데 음향디자이너로서 어떤 공연의 음향이 별로라고 판단될 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되겠죠. 그 다음에 해야 할 질문은 ‘나라면 어떻게 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과감한 시도로 무뎌진 감각을 되살리기


권지휘가 음향디자이너로서 참여한 첫 작품은 뮤지컬 <커피프린스 1호점>(2012)이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그렇듯, 그전까지 오퍼레이터로만 일해왔던 그에게 음향디자이너의 일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고 시행착오는 끊이지 않았다. 그는 머릿속에 있는 음향적인 기대치를 충족하기 위해 사비를 써서 보조 장비들을 구매했고 이를 무대 안팎에 채워 넣었다는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고액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충당할 수 있는 선에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해도, 첫 작품은 혼자만의 금전적 투자를 포함해 온통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2012년의 대학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했거든요. 지금과는 인식이 여러모로 달랐어요. 음향적인 효과를 위해 장비가 더 필요하다고 했을 때 제작사 쪽에서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들어보기 전부터 난처해했죠. 제작진들 사이에서 확성 음향에 대한 이해도가 서로 달랐던 시기이기도 해요. 음향 장비가 더해진 무대를 직접 경험해보면 다들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그렇게 첫 공연을 올렸을 때의 짜릿한 기분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그 이후 즐겁게 작업한 추억을 돌이켜볼 수 있는 참여작에 관해 물으니 순식간에 일고여덟개의 작품 이름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음향 파트의 담당자로서 ‘목소리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공연에 모두 참여하는 건 그에게 마치 운명처럼 느껴진다. “선한 영향력을 지닌 실존인물의 삶을 무대에 복원하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구상한 창작자들과 함께 동료로 일할 수 있는 기쁨이 가장 큽니다.”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목소리를 전한 <태일>(2018)을 시작으로, 곧 세 번째 프로젝트인 <百人堂(백인당) 태영>의 개막이 예정되어 있다.



(좌)목소리 프로젝트 1탄 음악극 <태일>(2018) 中, 사진 박귀섭(BAKI)
(우)목소리 프로젝트 2탄 음악극 <섬:1933~2019>(2019) 中, 사진 서울사진관 



❝대학로의 70석짜리 소극장에서 <태일>이 재공연 되었을 때 ‘뮤지컬이라고 왜 무조건 마이크를 써야 해?’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됐어요. 그래서 육성을 사용했죠. 목소리 프로젝트 2탄 <섬:1933~2019>은 소록도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했던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삶을 담은 작품인데, 후반부에 인물들의 의견 차이가 격렬해져서 날선 소리를 주고받는 말다툼 신이 있어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혼란과 갈등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이 문제에 있어서는 관객들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일종의 공감대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확성의 역할을 없애고 육성 위주로 진행했고요.




뮤지컬 <아일랜더>(2022) 中, 사진 김윤희



지난 해, 뮤지컬 <아일랜더>(2022)의 재연에서는 목소리 프로젝트에서 고민했던 지점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그는 원작을 보면서 버스킹 연주의 현장을 떠올렸고, 음향적으로 날 것의 모습을 보여줄수록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소통의 힘이 관객들에게 더 잘 전해지리라고 보았다. 핀마이크를 제거한 채 배우의 육성으로 진행되는 방식의 공연을 제안한 이유다.


극장에서 공연을 볼 때 관객들은 대개 배우의 진짜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에요. 배우가 사용한 마이크를 거쳐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를 듣는 거죠. 즉, 배우와 관객 사이에 음향이 한 꺼풀의 개입을 하게 되는 거죠. 물론 저는 음향디자이너로서 확성을 통해 많은 관객분들에게 소리를 잘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가장 좋은 소리는 사람이 가진 본래의 소리라고 생각해요.


규모가 큰 극장에서 소리가 전달되는 방식, 확성에 익숙했던 일부 관객이 어색함이나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고도 그는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우란2경에서의 <아일랜더> 무대는 객석이 360도로 배치되어 있고 배우는 관객을 마주하기도 하고 등지기도 한다. 여기서 핀마이크를 제거할 경우, 마주 보고 있는 배우의 목소리와 뒤를 돌아본 배우의 목소리는 다르게 들릴 수밖에 없는 것. 이런 의도된 이질감을 관객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관객이 배우의 대사 속에 있는 모든 음절을 정확하게 다 들어야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배우는 온몸으로 연기하며 감정을 전하고 있고, 육성을 통해 목소리의 질감이 다르게 들리는 게 이야기를 방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배우와 관객 사이에 진정성 있는 호흡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고요. 무엇보다 사람의 귀는 한 번 청각적으로 큰 자극에 노출되면 조금만 볼륨을 낮춘 소리라도 잘 안 들린다고 느끼게 되거든요. 더 섬세한 소리를 감각하기 어려워지는 거죠.




모노극 <그라운디드>(2020) 中, 사진 김윤희



그는 음향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제안한 청각적 아이디어를 연출가가 전적으로 수용해준 작품으로 모노극 <그라운디드>(2020)를 소개한다. 이 작품은 비행기 조종사인 주인공이 발 딛고 있는 공간을 실감 나는 사운드로 드러내기 위해 45채널(스피커 45통)의 멀티아웃풋을 구성했다. 또한, 극 공간보다는 주로 국내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적용되기 시작한 ‘이머시브 오디오 프로세스’를 활용해 이머시브 포맷에 적합한 설계를 이루어냈다.


특히 권지휘가 “국내에서 이렇게까지 다채널로 연극을 올렸던 작품은 지금까지 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데에는, 평면의 무대 안에서 주로 x축, y축에서만 사운드가 구현되었던 기존의 사례를 넘어 <그라운디드>는 높이를 관장하는 z축까지 설계를 실행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즉, 청각 공간이 3차원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음향디자인이 이루어진 것. “물론, 완벽한 시스템은 아니더라고요. 시스템이 가진 한계를 보았지만, 이 또한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추후 유사한 작업을 하게 될 기회가 생기면 시스템 설계를 어떤 식으로 바꿔봐야 할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창작자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재단과의 작업을 통해 그는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다음 세대의 음향디자이너를 위하여


권지휘가 이 일을 시작한 건 눈 밝은 창작진이 자신의 음향 믹스 작업에서 디자이너적인 관점이 보인다는 의견을 들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음향디자이너에 대한 전문적인 공부 없이 실전에 뛰어든 그는 늘 자신이 모르는 게 많다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에 임해왔다. 누군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부분을 몸으로 직접 경험해야만 받아들여지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저는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어요. 여전히 이 일은 해도 해도 어렵고 새롭고, 조금 알겠다 싶으면 슬럼프가 오고요. 그럴 때 개의치 않고 꾸준히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조금 나아진 것 같은데?’라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런 패턴들 속에서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일을 제가 하고 있다는 것, 그 두 가지가 합쳐진 지점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묘한 쾌감이 들어요. 저는 기술 전문가지만 한편으로는 창작자이기도 하니까요.


권지휘는 앞으로의 10년에 대한 질문에서 지금처럼 계속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여기에 더해, 젊은 창작자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에게 배우고 싶다는 바람 또한 전했다. 그는 상대방이 무대예술에 접목되기 어려워 보이는 영화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오더라도, 그것을 극공연에 반영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그건 영화지 이게 어떻게 무대에서 가능하겠어"라고 하는 대신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요. 노력이 필요해요.” 더불어, 극공연 음향 파트에서 일할 후배들의 저변을 확대하고 처우를 개선하는 법, 그들의 전문성을 높이는 법에 대한 고민 역시 그의 몫 중 하나다. 현업에 자리한 선배 음향 전문가들의 강연도 좋겠지만 이야기를 나누어 볼수록 그는 예술인들의 학교를 꿈꾸는 듯하다.


제가 음향 일을 하기 전에 호텔리어로 10개월 정도 근무한 적이 있어요. 큰 체인 시스템을 가진 호텔이었는데요. 사내에 직원들의 서비스 교육을 담당하는 전문적인 파트가 있었어요. 그 시절에 제가 받았던 서비스 교육이 그 이후 저의 모든 직업적인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후배들이 업계 선배들로부터 전문 지식을 전수받는 것도 좋겠지만, 누군가를 서포트하고 서비스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관점도 차근차근 배웠으면 좋겠어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할 것 같은 음향디자이너에게 끝으로 이 일이 자신의 성격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물었다. 그는 의외의 답변을 들려주었다.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그냥 공원 잔디밭에 누워서 재즈 음악 들으면서 멍 때리는 거 좋아하고요. 저는 확답을 잘 하지 않아요." 라이브 음향에는 늘 변수가 있고, 그는 변수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해야만 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마이크가 죽으면 어떡하지?’ 그런 것들에 대해 늘 1안, 2안, 3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누군가가 의견을 구할 때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면서 확답을 피하는 거죠. 가까운 가족이 저를 무척 답답해합니다. (웃음)


 


 

☑️ 권지휘의 구간점프

과거의 어느 날 보았지만 언제든 시간의 흐름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란피플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인생작을 소개합니다.

 


 


권지휘는 음향디자이너로서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하는 부분과 보편적인 사고를 동시에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는 공연 리허설을 하다가 지치면 쉬지 않고 완전히 다른 장르의 책을 펼치는데, 이러한 행동이 바로 보편적인 사고를 가지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일러주었다.


인문학, 철학, 심리학, 소설, 무엇이든 한 페이지를 미처 다 못 보더라도 상관없어요. 잠시 기분을 환기하고 나와는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바라보는 거죠.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좋아해요. 언어의 탄생, 우리가 입 밖으로 내는 소리, 그 사이사이에 있는 침묵이 가진 의미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에요. 너무 어려운 책이고 아직 완독하지 못했지만 일하다가 중간중간 한 페이지씩 넘겨보곤 합니다.

초등학생 때 우연히 보았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도 좋아해요. 음향 작업의 명료도를 높이기 위해 아등바등 현장에서 일할 때마다 이 책에서 보았던 광활하고 큰 우주를 떠올리면 내가 하는 일이 좀 더 편하게 느껴지거든요.




글. 서해인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