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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들의 힘, 백은혜 배우







“그래서 그 인물은 실제로 당신을 얼마나 닮아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백은혜 배우는 익숙한 MBTI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MBTI 검사를 할 때마다 자신에게서 내향성과 외향성의 비율이 고르게 반반씩 나오곤 한다고 했다. 내향적이기도 외향적이기도 한 사람은, 결국 누구든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가 전작들에서 보여준 역할들이 그 증거였다. 그는 온종일 낮잠을 자면서 세상만사에 초연한 듯한 누군가의 딸 ‘막달레나’(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였고, ‘며느리다움’으로부터 가장 먼저 해방을 선언하는 누군가의 며느리 ‘혜린'(드라마 <며느라기>)이었다.


첫 질문으로 돌아가, 그는 무대 위에서 선보이는 모든 캐릭터에게는 조금씩 자신의 일부분이 들어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제 안에 있는 슬픔을, 따뜻함을, 이성을 꺼내어 써왔다. 원캐스트로 연극 <세인트 조앤>을, 곧이어 뮤지컬 <웨이스티드>를 작업하다 보니 계절이 바뀌었다. ‘벌써 봄이 왔다고?’ 싶을 정도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이제 막 목소리 프로젝트 3탄 <百人堂(백인당) 태영> 첫 공연을 올린 백은혜 배우를 만났다.







‘목소리 프로젝트’에 속한 6년의 시간 


우란문화재단과 함께하고 있는 목소리 프로젝트(박소영, 이선영, 장우성)는 ‘선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귀감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았던 인물들의 어문 자료 즉, 말과 글의 형태로 남아있는 해당 인물의 삶과 사상을 무대에 복원하려는 취지로 2017년에 시작됐다. “<태일> 대본을 얼마 전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대본 귀퉁이에 거의 ‘귀’라는 게 없을 정도예요. 너무 많이 넘겨봤거든요.” 목소리 프로젝트가 조명한 첫 인물은 노동환경의 개선을 요구했던 ‘전태일' 열사다. 그의 삶을 보여주는 <태일>에 합류했던 그의 첫 마음은 어떤 모양이었는가에 대해 먼저 물었다.


❝<태일>을 준비할 당시에는 사명감이 컸어요. 좋은 취지를 가진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됐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그 일원으로서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공연을 여러 번 하면서 알게 됐죠.❞





그는 ‘태일 외 목소리’의 다른 캐스트였던 김국희 배우가 마지막 공연날 퇴장하는 관객들에게 스위치로 켜고 끌 수 있는 초를 나누어주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관객들이 공연장을 빠져나가면서 받은 초 하나하나가 그분들의 일상에서 주변 사람들을 밝혀줄 수 있겠더라고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요. 결국 모든 시작은 초 하나부터라는 것을요. 그게 목소리 프로젝트의 취지이고 배우가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이라는 걸 깨달았죠.





목소리 프로젝트 1탄 음악극 <태일>(2018) 사진 박귀섭(BAKI)



총 세 번의 목소리 프로젝트에 연속으로 참여하고 있는 백은혜 배우가 이 프로젝트에서 분한 역할들은 기능적으로만 봐도 다채롭다. <태일>에서는 태일의 삶을 서술하는태일 외 목소리로서 1인 다역을, <:1933~2019>에서는 과거의마리안느와 현재의고지선서로 다른 두 인물을, <百人堂(백인당) 태영>에서는태영의 유년부터 노년까지를 보여준다. 평소에도 호흡이 빠른 극을 선호한다는 백은혜 배우에게 <태일>은 좋아하는 걸 맘껏 해볼 기회였다. 여러 역할을 빠르게 오가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희열이었다. 다양한 캐릭터를 빠른 호흡으로 오가면서도 어떻게 순간 집중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는 <태일>태일 외 목소리역할을 어떻게 더 잘 해낼 수 있을지 고민할 때 박소영 연출가와 나눈 대화가 큰 도움이 됐다고 전한다


❝1인 다역이라고 해서 멀티플레이어가 될 필요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지휘자에 더 가깝다는 말이 힌트가 됐어요. 숨 가쁘게 여러 역할을 오가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끌어가는 존재라는 거예요. 관객들에게 “들어주세요”가 아니라 “듣고 싶은 마음이 드신다면 저를 믿고 따라 와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는 거죠.





목소리 프로젝트 2탄 음악극 <섬:1933~2019>(2019) , 사진 서울사진관



그런 그에게 가장 도전적으로 느껴졌던 역할은 <섬:1933~2019>의 두 인물 ‘마리안느’와 ‘고지선’이다. 1966년의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마리안느와 2019년의 서울에서 발달장애인을 양육하는 고지선. 백은혜 배우는 이 작품에서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삶을 오가며 연기했다. 일본이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소록도로 강제 송치했던 과거부터 장애인이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오늘날까지 <섬:1933~2019>의 타임라인은 총 80여 년에 걸쳐있는데도 언제나 대상을 달리한 편견과 혐오가 존재한다. 게다가 이 작품의 엔딩은 소위 ‘사이다’를 향하지 않는다. 만일 속 시원한 해결책을 기대한 관객들이 있었다면 그는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고.


❝<섬:1933~2019>을 작업할 때에는 제가 차별과 편견의 문제를 두고 급진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사회 운동가가 아니라 배우라는 점을, 그러나 그들이 외치는 것과 동일한 문제를 다룬 공연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떠올렸어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지만 세상에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계속 해나가는 이들이 있다는 걸 전하고 싶었습니다.


<섬:1933~2019> 연습 당시 백은혜 배우를 포함한 출연진과 제작진 일동은 작품의 주요 배경이 되는 소록도에 당일치기로 방문했다. 급하게 수소문해 가능한 버스 한 대를 대절했고, 다음 날 아침 8시에 우란문화재단 앞에 집합해 버스와 배를 타고 섬에 다녀왔다. 아름다운 경관을 가졌지만, 아픈 역사를 가진 곳에서 그들이 눈과 마음에 담아온 건 무엇일지 궁금했다. “한센병 환자들이 거세 수술을 했던 장소, 수용소를 둘러보았고, 벽화가 굉장히 많았던 기억이 나요. 저희끼리는 별달리 많은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묘한 공감대를 나누고 있다고 느꼈어요. 소록도에 있는 한 성당에서 넘버 ‘희망은’을 즉석으로 다 함께 호흡을 맞춰 불렀던 순간도 잊을 수 없어요.” 






‘꾸준함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날들


백은혜 배우는 총 세 번의 목소리 프로젝트 시리즈와 <오만과 편견>, <웨이스티드> 등을 박소영 연출가와 함께 작업해왔다. 그는 전혀 모르는 이들이 공연을 올리기 위해 소통하고 설득하고 서로를 납득시키는 과정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여러 번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이와 같은 관계가 각별하다고 말했다. 


<百人堂(백인당) 태영>만 놓고 보면, 같은 프로젝트 내에서 여전히 이어가야 할 지점은 무엇이고 이전 두 번과 달리 접근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연출님의 고민이 깊을 거라고 짐작했어요. 제가 그 고민에 해결책을 찾아 준다기보다는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작품을 위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는 되어줄 수 있는 거죠. 배우 입장에서도 물론 좋은 점이 많아요. 연출가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이해하는 게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상대의 머릿속이 잘 보인다는 기분을 종종 느끼거든요. 물론 연출님은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어요. (웃음)❞


목소리 프로젝트 3탄에서 조명할 인물이 이태영 변호사라는 걸 듣게 됐을 때 백은혜 배우는 자신에게 인물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1952년, 여성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도 여성이 판사가 되는 건 “시기상조”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어야 했던 사람.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어 약 40년의 세월을 쏟아부어 가족법 개정을 이끌어 낸 사람. 백은혜 배우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을, 이전까지는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한 인물의 삶을 살뜰하게 공부하고 조사했다. 


목소리 프로젝트는 잘 모르는 상태를 탓하는 게 아니라 모를 수도 있지만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겠느냐는 정서를 공유해요. 기억해야 할 누군가의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거죠. 어떤 인물의 삶이든 담백하게 전하고자 하고, 공연을 보신 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고민을 이어가게끔 만들고 싶어요.





목소리 프로젝트 3탄 음악극 <百人堂 태영>(2023) 中, 사진 이강물



그렇다면 그에게 이태영 변호사는 어떤 인물로 느껴질까?


❝가지 않았던 길을 가셨던 분이고, 그 선택을 위해 모든 걸 감당한 인물 같아요. 그분의 삶을 들여다보면 누군가에게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을 가지셨던 분 같기도 하고요.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고 끝까지 하는 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분이라고 무섭지 않았을까요? 그만하고 싶을 때가 없었을까요? 그런데도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계속 가실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통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인물을 떠올린다. “이태영 선생님은 멈추지 않고 공부를 하셨던 분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저에겐 그분이 여전히 밤마다 안경을 쓰고 무언가를 공부하는 엄마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한편, 무대 위에 그려진 이태영 변호사는 누군가에게 꾸준함의 화신으로 비칠 지 모른다. 그는 일곱 살 소녀로서 연단에 올랐을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총 세 번의 웅변대회에 나가 목소리를 높여 외친다. 서로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결국은 여성의 인권에 대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그는 호주제 폐지를 위해 꾸준히 사회가 넘어오지 말라고 그어 놓은 선을 넘었다. 팽팽한 선을 끊어냈다. 백은혜 배우는 최근 무엇에 꾸준히 임하고 있을까.

❝요즘의 저는 뭐 하나 꾸준히 하는 게 없기 때문에 오히려 꾸준함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는 중에 가까운 것 같아요. ‘매일 유산균을 먹는 것도 꾸준하다고 말할 수 있나?’, ‘작심 3일을 계속 반복하면 꾸준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나?’ 같은 가벼운 질문을 가져보는 거죠.❞




백은혜 배우는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통해 꾸준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음이 좋다고 말한다. 또한, <百人堂(백인당) 태영>을 보러 온 관객에게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목소리 프로젝트 전작들에서 얻었던 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으니 우린 목소리를 듣고, 또 내는 걸 멈추지 말아야 해요.”


 


 

 ☑️ 백은혜의 구간점프

과거의 어느 날 보았지만 언제든 시간의 흐름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란피플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인생작을 소개합니다.





백은혜 배우에게는 스무살 즈음 뮤지컬 <거울공주 평강이야기>를 보며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7년 후, 자신이 그 작품에 참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는 채였다. 이 이야기는 전래 동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를 재구성해 평강공주의 하녀인 ‘연이’의 관점에서 펼쳐진다. 연이는 ‘평강공주’를 모시지만, 스스로 구축한 세상 속에서 공주로 살기 위해 분투한다. 그의 목표는 우연히 만난 ‘야생 소년’에게 자신이 공주만큼이나 사랑받을 만한 존재임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야생 소년이 전하는 순수한 마음 덕분에 연이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토록 따뜻한 작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젊은 연출가 및 배우들이 모인 극단 ‘간다'의 첫 작품이다. 무대장치와 소품이 부재한 자리는 배우의 움직임으로, 악기와 음향 효과는 그들의 목소리로 구현해 냈다. “20대 대학생들이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하는 현실적인 대견함도 있었던 것 같아요. 관객인 저도 20대였는데 말이죠. 배우들의 목소리만으로 많은 걸 전달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사랑'이 가진 힘 같은 것을요.” 





글. 서해인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