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피플

우란피플

사업보고 게시글

분석과 창작의 경계에서, 윤현학 그래픽 디자이너








이름을 지어야 할 때가 있다. 세상에는 이미 누군가 자신의 소속을 드러내고자 선점해 버린 고유명사가 많고 작명의 출발점은 천차만별이다. 때로는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이름을 거꾸로 배치해 보기도 한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아주 작은 부분도 오래 걸려서 작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점에서 ‘마이너리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지은 이름이에요.”


윤현학은 7년 차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최근 법인으로 전환한 2인조 그래픽 스튜디오 ‘메이저 마이너리티’의 대표다. 리서치 기반의 그래픽 디자인 작업을 하는 콜렉티브를 막연히 꿈꿔왔던 그는 현재 같은 일을 하는 아내 이은지 디자이너와 함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데드라인까지의 시간 관리와 작업의 완성도를 각자의 우선순위로 두는 두 사람이 만났다. 작업의 완성도는 다음으로부터 나올지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걸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것.’ 이러한 태도는 직업인으로서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된다. 윤현학 디자이너와의 대화는 때로 피곤하거나 괴롭더라도 그가 끝까지 지키고 싶어하는 ‘마이너리티’란 무엇인가를 짐작해보게 했다.  






명료하고 재미있게


신규 전시 소식은 늘 포스터와 함께 알려진다. 그래픽 디자이너인 윤현학에게 있어 포스터는 다른 여러 작업에 비해 자유도가 높게 느껴지는 작업 중 하나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가장 먼저 전시가 지닌 주제 의식을 파악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왜곡 없이 전하기 위해 고민한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온라인으로 가장 먼저 전시 소식과 함께 포스터를 보게 될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미지의 세계에 재미를 더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일이 뒤따른다.


❝포스터는 전시의 얼굴이잖아요. 사람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다른 어떤 정보들보다도 그래픽이 그런 것들을 재미있게 풀어갈 수 있을 테고요. 그래픽 디자인이 갖춰야 할 여러 덕목들 중에서 ‘유희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란문화재단의 전시 <밤이 선생이다>의 그래픽 디자인 작업으로 재단과의 협업을 시작했다. 전시 타이틀은 예비 관람객들에게 가장 직관적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치인 만큼이나 디자이너가 멈춰 서서 생각해 보게 만드는 닻이 된다. <밤이 선생이다>는 전시명을 시각화한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먼저 하고 이후 전체적인 그래픽을 제작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옛 선조들의 술문화와 풍류를 되돌아보는 전시인 만큼 '술'의 속성에 집중했다고 한다. 


❝글자에는 술이 가진 액체성과 질감을 담아내려고 했어요. 따로 떼어서 봤을 때 미적으로 보기 좋은 타이포그래피를 만들었더라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분위기에 집중하여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 나갑니다. 밤에 자기 자신에게 고요히 빠져드는 분위기를 구현하기 위해, 달과 같은 원의 형태, 별처럼 명멸하는 패턴을 더해서 완성했습니다.❞


2023년 7월부터 우란1경에서 관람객을 만나고 있는 전시 <둔갑문>의 그래픽 디자인 작업은 그에게 있어 조금 더 도전적으로 느껴졌던 작업으로 기억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둔갑'은 자신의 몸을 감추거나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일. 옛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은 마음을 여러 형태의 문양으로 둔갑시켜 그들 삶 속 곳곳에 두었다고 한다. 전시에서는 이런 문양이 현재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살펴본다. 그는 가장 먼저 전통 문양 포털에서 다양한 문양을 찾아보았다. <둔갑문>의 그래픽 요소를 설명하는 데에도 <밤이 선생이다>와 마찬가지로 ‘질감'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했다.


만져지지 않지만,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질감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둔갑문'이라는 문자와 문양이 만나는 지점들에서의 처리 방식이 조금씩 다 다른데요. 무언가가 ‘펑'하고 바뀌는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문자와 문양이 합쳐진 그래픽 전체가 또 하나의 문양처럼 읽히길 바랐습니다. 전시를 오가시기 전에 포스터를 들여다보실 기회가 있다면 그런 부분을 주목해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Decoding Dictatorial Statues, 출판사: 오노마토피 Onomatopee, 2019, 출판물



디자인 작업의 기초가 되는 리서치 


활동 기반이 국내가 아닌 유럽이었던 시절, 그의 이름 ‘Ted Hyunhak Yoon’을 알렸던 초기작은 2019년 네덜란드 에인트호벤 기반의 시각예술 출판사 Onomatopee를 통해 출간된 <Decoding Dictatorial Statues>다. 레닌, 스탈린 등 역사 속 독재자들의 조각상을 시각적으로 분석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에 앞서, 런던의 왕립 예술 대학(Royal College of Art) 재학 시절의 그는 각자 지닌 문화적인 배경과 프로젝트 주제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명확히 하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점은 북한의 동상이었어요.” 2016년, UN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에서 제작한 대형 조형물을 수출금지 품목에 포함하기 전까지, 북한은 40여 년 가까이 조각물과 기념비를 제작해 외화를 벌어들였다. 그는 한국 태생의 사람이 북한의 기물을 작업의 주요 소재로 삼은 게 자신의 프로젝트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설득력을 가졌으리라고 말한다.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추종자들이 주도하는 동상 건립을 두고 베를린에서 찬반 운동이 벌어졌던 일도 함께 언급한다. “그런 일들을 유럽에서 기사로 접하면서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았어요. 제 프로젝트의 시작도 탄력을 받았고요.”



Decoding Dictatorial Statues, 출판사: 오노마토피 Onomatopee, 2019, 출판물



<Decoding Dictatorial Statues>은 영국의 크리에이티브 플랫폼 <잇츠 나이스 댓(It’s Nice That)>과 미국의 예술 잡지 <브루클린 레일(The Brooklyn Rail)>을 포함한 다양한 외신을 통해 소개되었다. 동상 머리의 기울기와 손의 제스처 등을 탐구하는 그의 프로젝트에는 ‘클리셰(Cliché)’라는 수식어가 늘 붙어 있었다. 디자이너로서의 윤현학이 접근 방식이나 표현법이 진부하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시각적으로 반복되는 무언가를 볼 때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떤 동상을 묘사하는 기존의 방식을 볼 때에 ‘반복적인 제스쳐’를 지칭할 수 있는 단어 자체를 많이 접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제 나름대로는 어떤 표현이 적절할지 오랫동안 떠올려 봤는데, 그러다 작업에 대한 크리틱을 받으면서 ’클리셰’라는 단어가 언급되었고요. 이 단어가 대중매체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는 경우가 많잖아요. 하지만, 저는 긍정과 부정을 떠나 제가 가진 관점을 설명하고 싶었어요.❞ 




웅변술에 관한 지침 Notes on Gestures, 전시전경(얀 반 에이크 아카데미 오픈스튜디오 2018, Jan van Eyck Open Studios 2018), photo: Romy Finke



독재자의 동상이 오른손을 들고 하늘을 가리키는 포즈를 취하는 ‘클리셰'를 혹시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물었다. “개인작업 <웅변술에 관한 지침>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건데, 영어로는 ‘staged’라는 단어도 어울리겠더라고요. ‘무대에 올려진', ‘일부러 꾸민’ 같은 의미죠. 완벽한 연출이라는 게 중요해요.” 실제로 그 동상의 모델이 된 지도자가 그런 제스처를 많이 취했는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북한에서 제작되는 동상은 모델이 되는 지도자의 인체 비율을 왜곡한다. 그런 식의 비율이 아프리카로 수출되는 동상에도 그대로 쓰여왔다. 


❝독재자 동상의 제스처와 실제 인물 사이에는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게 리서치의 결과예요. 일종의 템플릿화 된 이미지가 동상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거죠.❞


이 책과 함께 윤현학은 ‘그래픽 디자인 리서처(graphic design researcher)’로 소개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하는 건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일이다. 그런데 ‘리서처'는 디자이너의 일을 설명하기엔 낯선 말처럼 느껴진다. 그는 창작의 단계로 나아가기 전에,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는 사전 단계를 거친다. 그렇다면, 분석과 창작, 인풋과 아웃풋의 경계는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창작자가 시각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리서치의 모음을 늘어놓으면,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요? 프로젝트 전체의 흐름을 잡는 리서치와 시각적으로 퍼즐을 맞추기 위한 리서치를 비슷한 비율로 유지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암스테르담에서 서울로 활동 거점 이동하기


윤현학의 개인 작업은 네덜란드의 소도시 마스트리히트를 주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둔다. 네덜란드지만 벨기에의 접경지에 있는 곳. 두 나라를 모두 들르고자 했던 관광객들에게는 오래된 성곽이 있는 아주 조용한 동네로 묘사되는 곳. 그가 머물렀던 ‘얀 반 아이크 아카데미(Jan van Eyck Academie)’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어떤 시간이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국 왕립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예술성을 가진 하나의 개인으로 알아서 성장하길 바란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학생들을 방임하는 분위기랄까요. 자유롭지만 그만큼 불안했죠. 그런데 졸업 후 작가로 생계를 유지하기와 디자인 회사에 취직하기, 저는 그 기로에 서 있었고요. 그러다 우연히 ‘시각예술가들의 연구소’라고 불리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알게 된 게 큰 반가움이었죠.❞


그에게 있어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현실과 동떨어진 장소에서 관심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포맷을 넘나들며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중간중간 입주 작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는 다른 동료 예술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이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마친 2018년, 윤현학은 암스테르담의 한 디자인 사무실에 소속되어 근무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네덜란드가 가진 작업 환경적 이점과 여러 한계를 동시에 체감했다고 한다. 


❝책을 네덜란드에서 출간할 수 있었던 건, 그곳에 디자이너를 지원하는 제도적인 기반이 잘 갖추어져 있고, 스튜디오 등의 공간도 합리적으로 임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다가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를 계기로 귀국하게 됐어요. 처음부터 활동 거점을 옮길 생각이 확실한 건 아니었어서, 2년 정도는 해외에 있는 지인의 집에 제 짐을 맡겨놓기도 했는데요. 결국, 제 안에 다양한 클라이언트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한국을 포함해서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활동 범위를 넓혀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현학은 5년여 간의 타지 생활을 정리한 후 2020년부터 서울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서울에서의 그는 이전보다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프로젝트 양이 늘어났음을 체감한다. 이 과정에서 ‘나'가 아니라 함께 하는 ‘클라이언트’의 시선으로 일을 바라보고자 한다. 그럴 때 주어진 과업을 더 유연하게 완수할 수 있게 된다. 활약하는 무대가 달라진 후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물었다.


감각 있는 디자이너가 되는 일뿐 아니라, 회사를 운영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는 ‘감각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2인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회사를 운영하면서 깨닫게 됐어요. 다수의 일을 동시에 하다 보면 감각이라는 무형의 가치는 서서히 무뎌진다는 것을요.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감각을 펼쳐 보이려면 먼저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 점을 놓치지 않는 스튜디오를 만들고 싶어요.❞







 

 ☑️ 윤현학의 구간점프

과거의 어느 날 보았지만 언제든 시간의 흐름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란피플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인생작을 소개합니다.





20대 초반부터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음악을 디깅하면서 들어왔어요. 언더그라운드 래퍼 ‘엠에프 둠(MF DOOM)’은 그렇게 디깅을 하다가 알게 된 아티스트인데요. 엠에프 둠의 음악에는 미완성의 감각이 있어요. 준비되지 않은 채로 음반을 발표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아티스트로서 무책임하게 작업한다는 게 아니라 ‘이제 그만 여기서 손을 떼도 괜찮다’는 걸 느낀 사람의 결과물 같달까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저는 종종 완성도에 대한 강박을 느끼곤 하는데,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해소되는 지점이 있어요. 우리는 음악과 디자인으로 서로 다른 분야에 속해 있지만, 실은 저도 엠 에프 둠과 같은 선택을 하고 싶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경지에 닿을 때까지 계속해서 작업을 하기보다는 어느 시점에 멈춰 서도 정말로 괜찮다는 걸 알고 싶은 거죠.  





글. 서해인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