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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시간에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재난 상황들, 인공지능의 상용화를 비롯해 기술이 가져다주는 변화 앞에서 인류는 위기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적의 생활 방식, 합의된 규칙, 그럴듯한 대안은 이토록 혼란한 시대를 통과하는 동안 허물어지고 재편된다. 답을 모르겠어서 무력해진다. 그러는 동안 연극 연출가, 드라마투르그, 극작가 권세미는 재난과 기술을 새로운 이야기의 토대이자 인류가 다른 삶을 상상할 가능성으로 삼는다.
지난 해, 권세미는 배우 겸 창작자 성수연이 참여한 <연극의 연습, 연습의 전시-(비)인간 편>을 관람했다. “인간 배우가 수행하고 인간 관객이 경험하는 연기예술이 인간 중심적인 것은 얼마나 당연한가? 혹은 어떻게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프로젝트였다. 당시 관객으로서의 권세미에게 ‘비인간’은 그의 마음을 차지하는 중심 화두는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그는 재료들을 멀리 배치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각각의 연결점을 찾아 나가는 성수연 배우의 접근법에 흥미를 느꼈다. 성수연이 작년 프로젝트에 이어 더욱 확장된 형태로 비인간 연기에 대한 예술적 시도와 실험과정들을 전하는 연극 <B BE BEE(비 비 비)>를 작업한다고 할 때, 권세미는 협력아티스트를 비롯해 이 작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들을 개척해 나갔다. 권세미를 만나 그가 세상을 받아들이고 이를 작품에 반영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간의 몸에서 시작되는 상상력
<B BE BEE(비 비 비)>는 1인극이지만 이 작품이 관객을 만나기까지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이는 40인에 가깝다. 권세미는 크레딧에서 여러 번 이름이 보인다. 협력아티스트, 장면연구개발, 버추얼휴먼디자인. 무엇 하나 머릿속에 확실히 상이 그려지지 않는 각각의 역할에 대한 설명을 요청했다.
❝‘협력아티스트’는 고민을 많이 거쳐서 나온 이름이에요. <B BE BEE(비 비 비)>는 대개의 극 작품이 시작되는 문법, 연출이 최초의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배우가 이를 표현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았거든요. 배우이자 창작자인 ‘성수연'이 가지고 있는 질문을 기반으로 그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을 붙이는 작업이었어요. 협력아티스트의 일은 질문을 중심으로 구성의 조각을 모으는 데에 있었어요. 기존의 극 연출이나 드라마투르그 등에게 기대되는 역할의 일부를 이름에 구애 받지 않고 함께 만들어 나갔습니다.❞
‘장면연구개발’에 참여한 4인(권세미, 김슬기, 류혜영, 성수연)은 무대 위 구체적인 장면이 될 조각을 모으는 작업을 했다. 이들은 비인간에 대한 연극에서 가상 인간이 전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을 거라 보았다. 이를 위해 권세미는 게임, 시뮬레이션, 시각화의 디자인 및 개발에 사용되는 크리에이터용 툴 ‘언리얼 엔진(Unreal Engine)’의 ‘메타 휴먼’을 이용해 배우의 얼굴을 스캐닝 했고, 그를 닮은 가상 인간을 만들었다. 이러한 작업 과정을 ‘버추얼휴먼디자인’이라 부른다.
이렇듯 <B BE BEE(비 비 비)>팀은 작업 주체를 호명하는 데에 있어 편의를 따르기 보다 관성에 반하는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새로운 이름을 찾는 과정에서 한 사람이 각각의 역할에서 해내고 있는 다양한 일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배우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연기하기 위해 여러 기술을 연습하고 시도하는 연극 <B BE BEE(비 비 비)>의 기획 의도는 몸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몸 바깥에 있는 타자에 대해서는 상상력이 빈약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의지나 노력으로 해낼 수 있는 지점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이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이며, 그렇게 우리의 정체성을 단단히 규정한다. 인간이 벌을 연기하고, 그 주변에 가상 인간이 등장하는 구성은 먼저 ‘몸’의 관점에서 이 작품을 바라보게 만든다.
❝벌은 인간에 비해 몸집이 작고, 인간과 달리 하늘을 날아다니죠. 우리가 벌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건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요? 벌의 몸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는 아닐 거예요. 그래서 그 입장이 되어보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인간이 ’나’를 세계의 중심에 둘 때 발생하는 편향적인 사고 혹은 무심한 태도 같은 것들을 내려놓는 연습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연극 <B BE BEE> 中 사진 김신중
그 결과, 외양은 인간을 닮은 극 중 가상인간이 벌처럼 날아다니게 된다. 권세미는 ‘벌과 인간의 혼종 같은 몸’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한다. 꿀벌 무늬의 티셔츠를 입은 성수연 배우는 여전히 인간의 몸을 가진 채로 적극적으로 다른 존재를 상상하는 연습과 훈련의 장을 보여준다. 이는 오히려 ‘인간의 몸’을 세밀하게 감각하게 되는 순간으로 이어진다. 타자를 알고자 하는 원래의 목표에는 부합하지 않을지 몰라도, 더 깊은 자기 이해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성수연 배우가 ‘꿀벌 자세’를 따라 했을 때 자기 몸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들려주는 장면이 있어요. 그건 철저히 ‘인간 자세’거든요. 꿀벌이 그런 자세를 취하는 건 가야 할 목적지가 있기 때문인데, 같은 자세를 모방한 인간은 힘이 없어 보여요. 조금 울적해 보이기도 하고요.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두 개체의 차이는 그런 거죠. 인간이 벌의 감정과 마음까지 취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럼, 애써 벌을 상상해 보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나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이 극의 메시지는 도덕책에서 볼 수 있는 따분한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실용적인 방식을 알려준다. 나에게 있던 중심이 조금씩 타인 쪽으로 옮겨갔을 때, 나와 다른 존재 사이의 거리감을 볼 수 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의 규모를 파악해야만 그제서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권세미의 구간점프
과거의 어느 날 보았지만 언제든 시간의 흐름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란피플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인생작을 소개합니다.
❝미우치 스즈에의 만화 시리즈 <유리가면>은 연극하는 천재 소녀 두 명이 주인공이에요. 한 사람은 선천적이고, 다른 한 사람은 후천적이죠. 둘 다 천재적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경쟁이 일어나요. 물론 만화 속에 그려진 연극의 디테일은 현실의 연극과는 다른 지점이 많지만,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해 처음으로 알려준 작품입니다. 저는 천재들 옆에 있는 평범한 단원의 입장으로 이 만화를 봅니다. ❞
글. 서해인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