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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은 디자인 스튜디오와 출판 브랜드를 운영하는 디자이너. 한자 ‘취할 취(醉)’에 그래픽(Graphic)의 ‘그라프(GRAF)’를 조합해 디자인 스튜디오 ‘취그라프(CHUIGRAF)’를 만들었고, 철자 순서를 바꾸어 출판 브랜드 ‘아크루파이(ACRUFIGH)’를 세웠다. 그래픽 디자인을 지나치게 좋아했던 그의 초심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지만, 최근 주요 정체성은 식집사와 여섯 살 아이의 아빠이기도 하다. 30년 전부터 아버지가 기르시던 걸 대물림 받았다는 거대한 단모환 선인장이 반겨주는 취그라프 스튜디오에서, 최종원 그래픽 디자이너를 만났다.
오늘도 균형 잡는 중, 디자인 스튜디오 취그라프
취그라프는 “맥락과 형태, 엉뚱함과 섬세함, 감각과 기술 사이를 탐험하는 과정을 통해 균형 잡힌 디자인을 제안”하고 있다. 균형은 A와 B 양 극단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는 양쪽에 흑백논리의 값이 쉽게 놓이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것이다. ‘감각’의 반대편에는 반드시 ‘이성’이 위치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취그라프가 고려하는 ‘엉뚱함’의 반대편에는 왜 ‘안전함’이 아니라 ‘섬세함’이 놓여 있는 걸까?
❝가장 균형 잡기 까다로운 게 ‘엉뚱함과 섬세함 사이’인데요. 걷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볼까요. 그 사람은 큰 보폭으로 쿵쿵거리면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어요. 아무 계획 없이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큰 맥락을 잡아내는 게 ‘엉뚱함’이고, 어느 지점엔가 다다랐을 때 그 자리에서 큰 그림이 남에게 어떻게 설득될 수 있을지 디테일을 수집하는 게 ‘섬세함’이라고 봐요. 그 사이에서 새로운 가치와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와요.❞
클라이언트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을 제안하는 게 자신의 일이라고 말하는 그는 이런 균형 잡기의 결과가 가장 잘 드러났던 작업으로 <선화예술고등학교 제16회 드로잉 과제전> 포스터를 꼽았다. 전시의 주제는 ‘SELF-PORTRAIT(자화상)’로, 그는 과제 전시 특성상 출품작에 드로잉, 조형물, 타이포그래피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의 해석이 반영될 것을 고려했다. 그래서 영문 주제어에 들어있는 알파벳 철자들을 해체 후 재조합 하면서 다양한 표정을 가진 얼굴들을 만들어냈다.
선화예술고등학교 제16회 드로잉 과제전, 2020, 포스터
다른 하나는 증권박물관 웹사이트의 ‘이달의 증권' 코너에서 2년여간 소개된 세계의 증권 유물을 집대성한 도서 <증권연감 證券連鑑 Vol. 1>이다. 그는 증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실제 크기로 볼 때 전해진다고 보았는데, 인쇄를 하려고 보니 대체적으로 그 크기가 책의 판형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유가 증권을 실물 크기로 인쇄할 경우 범죄에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클라이언트의 의견은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고민의 결과, 종이를 겹쳐 제본하는 프렌치 폴드 제본(French-fold Binding)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인 콘텐츠는 내지 바깥 면에, 열리지 않는 안쪽 면에는 실제 크기의 증권을 인쇄하여 실물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도록 구현했다.
증권연감 證券連鑑 Vol. 1, 증권박물관, 2019, 편집디자인
지금까지 해 온 작업 중 최종원이 가장 보람에 남는다고 꼽은 작업물은 <월드비전 자립보고서> 소책자 작업이다. 그동안 취그라프는 오랜 협업 상대인 월드비전과 패키지 디자인(<글로벌 6K Running>), 소책자 디자인(<월드비전 자립보고서 2019-2023>), 연하장 및 달력 세트 디자인(<2020 New Year Set>) 등 다양한 포맷의 작업을 선보여왔다. 그중, 자립보고서는 한 마을이 더 이상 월드비전의 도움 없이도 자립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시점에 후원자들에게 그 소식을 알리는 용도로 쓰인다. 소책자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그동안 자립한 마을 목록을 수록한다. “후원을 통해 자립하는 마을이 늘어나면서 페이지의 여백이 모자랄 정도로 가득 차게 됐어요. ‘다음 버전은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까?’하는 행복한 고민이 들 정도입니다.”
자립보고서, 월드비전, 2019-2023, 편집디자인
리듬감을 살리는 디자인, 《아템포 A tempo》 그래픽 작업
우란전시 《아템포 A tempo》의 그래픽 디자인 작업은 이번 전시 도록의 기획 및 편집을 담당한 더리튼핸즈의 제안을 통해 시작되었다. 더리튼핸즈 문유진 실장의 한국도자재단 재직 시절, 전시 그래픽 디자인 작업을 계기로 협업이 시작됐다. 문 실장은 이후 소속 없이 독립 큐레이터로 일할 때도 취그라프에 여러 번 작업 의뢰를 주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오래 함께 일해온 만큼 서로의 영역에 대해 존중과 신뢰가 있다.
우란전시 《A tempo》, 2023, 포스터 및 도록
최종원은 작업을 할 때 주제를 추상적으로 떠올린 후 단순화시켜 표현하길 선호한다. 《아템포 A tempo》의 메인 그래픽 디자인에도 이러한 원칙이 적용되었다. 그는 먼저 전시에 참여한 세 작가(김동현, 김상훈, 이재익)가 금속을 망치로 때려 형태를 잡아가는 기법인 대공 작업을 한다는 점에 집중했다.
❝망치로 금속을 때릴 때 생기는 원형의 모양을 기본 모티브로 삼았고, 금속을 때리면서 생겨나는 리듬감을 표현하고자 했어요. 학부생 때 공예 수업을 들었는데, 망치로 구리판을 ‘땅땅땅’ 때리던 게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거든요. 전시의 제목 또한 ‘본래의 빠르기로'라는 연주 용어이니, 그래픽에도 리듬감이 드러나야겠더라고요.❞
전시 포스터 작업에 한정할 경우, 개인전과 그룹전에 따라 그래픽적으로 강조하는 방향이 다르다고도 한다.
❝개인전은 작가의 대표작을 포스터나 도록 표지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그룹전은 그렇게 풀어갈 수 없어요. 서로 다른 스타일로 작업 활동을 하는 세 작가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죠. 처음에는 금속의 차가운 느낌을 드러내기 위해 처음에는 메탈과 모노톤으로 시안을 잡았는데요. 좀 더 강렬한 대비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어요. 최종적으로는, 분홍색 바탕에 파란색 포인트를 더했습니다.❞
그러나 파란색은 다른 색 대비 발색의 폭이 좁아, 인쇄 시 제약이 많은 옵션인 탓에 《아템포 A tempo》 도록 작업 시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일반 잉크가 아닌 형광 잉크로 인쇄하여, 색이 가진 스펙트럼을 넓히고 조금 더 생동감 있는 파란색을 인쇄물에 구현해 냈다. 또한, 도록에 실린 작품 사진들도 모두 형광 잉크로 인쇄를 결정하게 됐다. 이는 도록에 쓰인 코팅되지 않은 종이인 ‘비도공지’에 형광 잉크로 인쇄 시 색이 좀 더 밝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쉽고 진지한 책을 만드는, 출판 브랜드 아크루파이
곧 창립 15주년을 맞이하는 취그라프는 요즘 어떤 고민을 지니고 있을까. “결론은, 클라이언트 작업의 비중을 점점 줄여나가야겠다는 거예요.” 과감하게 보일 수 있는 이 다짐은, 아무리 자유도가 많이 주어지더라도 진짜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대부분의 디자인 스튜디오가 가지고 있을 숙명적 조건 때문일지도 모른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요. 클라이언트 작업만으로는 스튜디오가 오래 생존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어요. 예전에 디자인 스튜디오의 수익 구조에 대한 보고서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디자인 스튜디오들의 매출과 수익 구조를 알게 됐어요. 오래된 조사라 지금은 숫자가 많이 바뀌었을 것 같은데, 롱런하는 디자인 스튜디오의 매출액은 대체로 구성원 1인당 매출이 대략 1억원을 넘어서는 수준이더라고요.
문제는 이 매출의 대부분이 용역 작업에서 발생한다는 것이었어요. 보고서에는 해외 사례 분석도 담겨 있었는데, 용역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게 눈에 띄더라고요. 용역 외에도 로열티 기반의 수익 구조를 함께 가지고 있는 회사들이 적지 않았어요. 불경기 등으로 작업 의뢰가 급격히 줄어드는 시기를 겪을 때, 용역만을 수익 구조로 삼는 스튜디오는 크게 위험할 수 있어요. 그런데 로열티 기반의 수입이 어느 정도 확보되면 위기를 겪더라도 견뎌낼 힘이 생기죠.❞
클라이언트 작업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한 발짝 내딛는 시도는 출판 브랜드 ‘아크루파이’ 론칭으로 이어졌다. 2022년에 첫 책을 출간하고, 이듬해 서점 등록을 마쳤다. 기독 서점을 운영하는 부모님을 보며 자란 그가 만든 첫 책이 성경책이라는 건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물론, 성경이 ‘잘 팔릴 책’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도, 부모님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 성경을 처음으로 완독한 경험은 각별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성경은 굉장히 읽기 힘들게 디자인된 책"이라는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확고해졌다. 일반적인 성경의 서체, 자간, 행간의 설정과 장과 절을 구분하기 위해 자주 등장하는 숫자들은 모두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였다. 그는 형식의 전형성을 깨고,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성경도 하나쯤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시리즈가 성경을 어렵게 느끼는 전 세계 독자들에게 많은 선택을 받아왔다는 걸 알지만, 그는 「메시지」 시리즈처럼 저자의 해석을 덧대기보다는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누구나 읽기 쉬운 성경을 만들고 싶었다. 이를 위해 대한성서공회의 새번역을 사용했고, 가장 먼저 성경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장과 절의 구분을 덜어냈다.
❝이 책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피드백도 감사하지만, 종교가 없는 분들로부터 성경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덜어졌다는 감상을 들어서 좋았어요. 저 역시 성경 전체 내용을 섭렵하는 것보다 그 중에서도 ‘요한복음', ‘마가복음' 같은 복음서를 통해 드러난 ‘예수’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로 생각했고요. ‘마태복음'은 시카고 대학교가 선정한 ‘시카고 플랜’ 필수 독서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인생 책이 될 수도 있을 복음서를 더 많은 분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사복음서 시리즈(2022), 시가서 시리즈- 잠언(2023), 아크루파이, 출판물
아크루파이는 지금까지 총 5종의 성경을 출간했다. 「사복음서」 시리즈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마치 소설처럼 읽히도록 편집했고, 「시가서-잠언」에는 시집 독서 경험과 유사하기를 바라는 의도를 담았다. 시리즈가 쌓이면 추후 접근성을 위해 소프트 커버 버전의 성경을 만들 예정이며, 한국 고전 작품, 더 나아가 고전 회화를 엮은 책도 제작하고자 한다. 2025년을 목표로 오프라인 서점을 꾸릴 계획도 있다.
맥락과 형태 사이, 엉뚱함과 섬세함 사이, 감각과 기술 사이를 더해, 지금의 최종원에게는 한가지 과제가 더해졌다. 클라이언트 작업과 자체 작업 사이의 알맞은 비중을 찾아 나가기. 그는 중심을 잡으며 계속 걷는 상태를 유지하는 작업자에 가깝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취그라프의 지난 14년을 돌아보면서 다양한 작업물에 대한 리뷰를 들었는데, 그의 이력 중에는 도예 전시 그래픽 디자인이 적지 않았다. “도예 작품을 좋아합니다. 언뜻 보면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그걸 빚은 작가마다, 작품마다 달리 보이는 디테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최종원과의 대화는 그동안 쉽게 지나쳐버렸던 대상과 나의 거리를 좁혀, 각각의 독특함을 바라보게 한다.
☑️ 최종원의 구간점프
과거의 어느 날 보았지만 언제든 시간의 흐름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란피플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인생작을 소개합니다.
❝대학 졸업반이 되기 직전에 데라사와 다이스케의 <미스터 초밥왕> 시리즈를 읽었어요. 제가 그때까지 열심히 사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주인공 쇼타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고 집념으로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멋있다고 느꼈어요. 제가 하는 작업에 대한 동기부여가 제대로 된 거죠. 그 이후로는 과제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고 무조건 열심히 했어요. 그러다 과로로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면서 생각해 보니, 이 만화를 접하고 나서 두 달이 지났더라고요. ‘아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면 안 되는구나’ 싶었지만, 초밥왕 쇼타는 저에게 그만큼 영향을 많이 준 인물이에요.❞
글. 서해인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