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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내는 사람, 성수연 배우·창작자








성수연은 우란공연 연극 <B BE BEE>(이하 ‘<비 비 비>’)의 제60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수상 소식과 함께 2024년을 맞이했다. 배우가 창작자의 역할을 겸한 결과로 작품상을 받는 경우는 이례적이라는 주변의 반응을 접했다는 그는 “좋은 결과가 있어서 감사했죠.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고요. 수상 여부와 관계없이 이 작품을 계기로 제가 달라지고자 애썼던 부분을 앞으로 어떻게 다뤄가면서 살아야 할 지 고민을 더 하게 됐어요.”라고 말한다. 배우이자 창작자로 활동하고 있는 성수연과의 대화는 그가 어디를 향해 길을 만들고 있는지 함께 찾아가는 시간이었다. 






<비 비 비>가

인간에게 던진 질문들


연극 <비 비 비>는 우란문화재단 레지던시에 입주하여 선보였던 프로젝트 발표 <연극의 연습, 연습의 전시 - (비)인간 편>을 확장한 작품이다. ‘비인간’은 성수연에게 중요한 화두였고, 재단에서 이 키워드를 품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과정을 설계해 주었다고 말한다. 


❝배우로 일하는 저는 고민의 결과를 공연으로 말해야 하는데, 공연의 관객은 언제나 인간이잖아요. 프로젝트 발표에서 떠오른 질문이 있었어요. 공연예술에서 인간중심적으로 비인간을 다룰 수밖에 없다면, 그런 시도에서 오는 한계를 줄일 수는 없을까?❞ 




프로젝트 발표 <연극의 연습, 연습의 전시 – (비)인간 편 / 사진 노승환, 안재경 



성수연은 그동안 보는 사람보다는 “‘(연기)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많이 해왔다”고 고백한다. 이를테면, 개 연기를 해야 할 때 개를 섣불리 대상화하지 않는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영화 <추락의 해부>의 주역은 극 중 안내견 ‘스눕’ 역을 맡은 ‘메시’다. 칸 영화제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를 펼친 견공 배우에게 수여되는 ‘팜도그 상(Palm Dog Award)’을 수상하는 등 화제를 모은 ‘메시’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관객석에도 초청받는 등 엄연한 1인분의 배우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그 개가 연기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죠.”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연기라는 말이 문득 형용 모순처럼 느껴질 때쯤, 그에게 의인화에 대한 의견을 청했다.


❝어쨌든 의인화는 우리의 이해의 범주 안으로 잘 모르는 대상들을 끌어오는 일인데요. 매번 모르는 걸 이해하기 위해 내가 아는 만큼의 방식으로만 대상을 끌어오는 게 과연 괜찮은 일일까요? 보통 의인화된 대상은 귀엽잖아요. 그러니까 안전해지죠. 그 대상이 우리를 더 이상 해치지 않는 존재로 변하고요. 그럴 때 조심하지 않으면 동물을 마음대로 다루게 돼요. 우리가 통제하고 관리하는 자연의 일부 정도로 그들을 대하는 거예요. <비 비 비>를 작업하면서 성찰하는 의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내가 모르는 대상을 조금이나마 알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조금 더 여러 방식으로 그 존재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럼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오는 나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거든요.❞ 






비인간을 연기하면서 희화화나 편견을 재생산하는 일에 일조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한때 창작자로서 위축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성찰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단 시도하고 실패를 통해 발견하는 것들에 대해 마음을 더 열어두자”고 마음을 먹었다.


❝너무 고민하다 보니 시도 자체를 안 하게 되더라고요. 관습적인 게 싫지만, 관습적이지 않은 길을 찾는 건 어려웠어요. 그러다가 내가 누군가를 해치는 게 아니라면 연습실에서라도 시도해 보자고, 그러고 나서 왜 이게 잘못됐는지를 알아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나이브하지 않은 창작자. 전형적인 방식에서 벗어나는 창작자. 노력의 방향은 그 순간의 최선에 닿아 있었지만, 그는 이 지점에서 배우가 아닌 관객의 자리에 자신을 앉혀 놓았을 때 어딘가 미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배우의 모습이 관객들에게는 어떤 질문을 남길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는 동아연극상 작품상 수상 소감에서, “작품 속 진동을 관객과 나누기 위해”서는 창작진들의 노력만큼이나, “작품의 의미를 읽어 내려 애써” 줄 관객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이 좋은 질문을 던진다면, 질문을 붙들고 답을 찾아 나가는 관객의 역할도 점점 커질 것이라 믿는다.



연극 <B BE BEE> / 사진 김신중



<비 비 비>는 멸종 위기의 벌을 시급히 보호해야 한다는 교조적인 메시지 대신, 다른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비인간과의 관계를 조명하는 지극히 관계 중심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극 중 어머니가 주인공을 향해 좋은 배우자를 만나길 바란다는 마음을 전할 때 “너를 세상에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게 싫으니까”라는 이유를 드는 <비 비 비>의 한 장면은 무대가 아닌 가족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주말 드라마에 이식해도 큰 무리가 없는 듯 보인다. 벌이 되고자 분투했던 주인공은 갑자기 어머니와 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걸까? 관계의 관점에서 <비 비 비>를 다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대사를 작업하기 전에, 엄마에게 제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일 거라고 한번 믿어보기로 했어요. 저한테도 엄마가 그런 존재일 테고요. 그런데 나중에 태어난 제 입장에서 엄마는 제게 주어진 가족이잖아요. 어떤 원가족을 만나는가를 개인의 팔자와 소관의 문제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믿기는 싫었어요.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 누군가를 가장 안전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존재가 오로지 운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저는 좀 슬퍼지거든요. 저는 인간끼리 가족이라는 형태로 상대를 구속하지 않더라도 서로에게 안전망이 되어줄 수 있는 관계를 만들기를 바라는 쪽이에요.❞ 


성수연은 벌 한 마리가 나 개인에게서 가장 먼 존재처럼 여겨진다는 것의 실체를, 그 ‘멀다’는 거리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의 전형인 인간 엄마와 딸을 무대 위로 끌어온다. 그동안 수없이 재현되어 온 노년의 엄마와 장성한 딸의 대화를 통해 정상 가족이 유일한 답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건 다소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역설을 통해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여러 관계들의 거리 감각을 느껴보게 만든다. 이는 창작집단 ‘이동시’의 일원이자 아마존 원주민 공동체 관련 연구자인 김한민이 「탈인간 선언(한겨레출판, 2023) 속에 드러난 바와도 같다. “생태계에는 고정된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무한한 관계들이 얽혀 있을 뿐이다. 중심은 잠시 나타났다가 휘발하는, 임시적인 초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는 일은 또 다른 중심을 세우는 걸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심은 비워둬도 괜찮다.” 







나도 모르게 생겨난 

두려움과 혐오를 극복할 수 있을까?


사실 성수연은 벌레를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가 원체 대담하기 때문에 <비 비 비>를 작업한 게 아니라는 의미다. <비 비 비>보다 한 해전에 작업한 프로젝트 발표를 준비하며, 여러 생물에 관한 자료를 본격적으로 리서치했다. 만일, 무대 위에서 벌을 연기하는 사람이 실제 생활에서 벌을 마주하기 꺼린다면 이는 관객을 속이는 일이 될 수 있으므로, 그는 보다 더 진실한 무대를 위해 자신의 공포를 다루기로 했다.


❝많이 보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제가 곤충을 연기하든, 사진집을 만들든, 먼저 리서치부터 해야 하는데 ‘와 진짜 이거 어떡하지’ 싶더라고요. (웃음) 근데 몇 달간 계속 보다 보니 괜찮아졌어요. 마음에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 호감도랄까 연결감 같은 게 생겨났어요.❞


그는 사진과 영상을 먼저 보고, 실제 곤충을 보는 식으로 점점 대상에 대한 노출의 빈도를 높여갔다. 서울환경연합의 ‘벌 볼 일 있는 사람들’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통해 눈앞에 있는 벌을 충분히 바라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고. <비 비 비>를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은 생활인으로서 그가 무엇에 더 호감을 가지거나 무엇에 덜 매력을 느끼는지 판단하는 기준에 영향을 미쳤다. 그가 두려움을 다루어 간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사 갈 때 벌레 많이 나오는 집을 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하지만, 곤충이 생존할 수 없는 도시 정비 계획은 분명 이곳을 살아가는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미쳐요.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은 대부분 우리의 시야에서 밀려나 있고 계속 끔찍하다고만 이야기되고 있어요. 사회 전반적으로도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기 위해 다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연극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고민해 봐야겠죠.❞ 



일일 야생벌 시민조사단 활동


<비 비 비>를 통해 성수연은 ‘움벨트(Umwelt)’라는 개념에 집중했다. 그는 주디스 콜, 허버트 콜의 저서 떡갈나무 바라보기(사계절, 2002)를 읽다가, 인간과 비인간은 같은 24시간을 공유하고 있더라도 각각 다른 움벨트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간과 진드기가 경험하는 시간이 엄연히 다르다는 건 그에게 의외의 해방감을 안겨줬다.


 

❝최근에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속도와 나의 속도가 맞지 않다는 데에서 오는 위기감과 우울을 느껴요. 단순히 트렌드를 따라갈 수 없다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내가 필요에 의해 무언가를 검색해서 알게 된 후에도 그런 감정은 남아있거든요. 그런데 각각의 종에게 고유의 움벨트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나니, 나만의 속도감을 유지해도 되겠다 싶더라고요.






김한민이 “탈인간의 가장 큰 적은 상상과 희망의 고갈”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의무와 책임을 떠안은 채로도 가끔 실없는 상상을 해볼 수도 있다. 벌이 공연예술의 관객이 된다는 것, 창작자인 인간과 관객인 비인간이 대화를 나눈다는 것. 그러니까, 만일 <비 비 비>를 관람한 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성수연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을까?  


벌은 아마 이렇게 말해주지 않을까요? “아직 마음에 들지 않으니 더 고민해서 발전된 걸 가져오세요. 그렇지만 애쓰신 만큼, 가끔은 우리의 비밀을 알려줄게요.”라고요. 엄격하지만 조금은 다정한 구석이 있는 그런 감상을 들려줄 것 같아요. 단, 인간이 벌을 이해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겠지만요.❞



실전에서 강해지기 위한

연습 인간


성수연은 커리어 전반에서 ‘연습’이라는 키워드를 꾸준히 붙들어왔다. 연습의 구체적인 단계를 묻자, 질문에 관한 답변이 돌아오기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연습이 여러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지만, 탁월한 연기가 배우의 대사, 감정선, 움직임으로 분해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보다는 자신이 필요한 상황에서 연기를 해낼 수 있는 길을 평소에 뚫어놓는다고 설명한다. 길은 어디선가 늘 막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피아노를 배울 때 먼저 왼손 따로 오른손 따로 연습한 다음에, 두 손으로 완곡을 연주할 차례가 오는데요. 그럴 때 그게 1+1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걸 알게 되죠. 왼손을, 오른손을, 각각 잘 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는 양손을 통합해서 무언가 다른 걸 만들어내요. 마찬가지로, 배우도 대사를 외우고, 정확한 딕션을 익히고, 몸의 움직임을 반복해도, 실제로 그 모든 것들의 총합을 관객이 앞에 있는 상황에서 해낼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가 인터뷰어로 참여하는 <연극in> ‘무엇을, 어떻게, 왜’ 인터뷰 시리즈는 또 다른 방식의 연습이다. 성수연은 동료 창작자들과 좋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구가 다름 아닌 듣는 연습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마주하고 나눈 대화를 녹취로 풀고 한 편 한 편의 완성된 원고로 정리하는 과정을 거듭할 때마다 그는 더 잘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다. 

❝<비 비 비>를 만들면서도 사람들의 말을 많이 녹음해서 들었고, 꿀벌을 관찰하기 위해 나갔던 야외 활동에서도 녹음한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이외에도 제가 이어폰으로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다시 말하는 방식으로 공연을 만들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제가 잘 모르는 대상에게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저를 둘러싼 세상이 확장되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배우와 창작자. 두 가지 정체성이 자신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굳이 하나를 골라서 자신을 소개해야 한다면 그는 ‘배우’를 택하겠다고 말한다. 

저는 배우로서의 일을 전제하고 창작을 하고 있어요. <비 비 비>에서도 연기하기 위해 글을 쓰고, 연출을 했으니까요. 배우라고 하면 무대 위에서 ‘실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강조되지만, 제가 소속된 극단 크리에이티브 VaQi의 작업을 비롯해 지금까지 해온 많은 작업들에서 배우가 하는 일의 범위는 훨씬 더 넓었어요.❞

배우로서 자신이 잘 실연할 수 있는 작업을 만들어 나가는 창작자. 그리고 틀에 갇히지 않은 다양한 텍스트와 배역을 소화하는 배우. 성수연은 주어진 역할에 따라 곳곳에서 관객을 만나는 상황들을 떠올리며 오늘도 연습한다. “누군가 제게 이제 뭘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전 아직 할 게 많이 남아 있다고 답할 거예요.” 



 

 ☑️ 성수연의 구간점프

과거의 어느 날 보았지만 언제든 시간의 흐름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란피플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인생작을 소개합니다.





❝2012년, 페스티벌 봄(Festival Bo:m)에서 독일 극단 쉬쉬팝(She She Pop)의 <유서(Testament)>를 보았던 기억이 나요. 셰익스피어의 고전 <리어왕>에 기반한 포스트 드라마 연극인데요. 무대 위에서 배우보다 비(非)배우가 훨씬 흥미롭다는 걸 알게 해준 작품이에요. 

이 이야기는 노인들이 자신의 왕국을 세 딸에게 물려주고자 은퇴를 합의하려는 계획이 실패하면서 시작돼요. 여기서 딸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실제 아버지 세 분이 ‘리어’ 역으로 활약하는데요. 아빠들과 딸들이 격렬하게 싸우고, 부녀의 재산 싸움이 도표로 나오면서 일종의 다큐멘터리가 되어 버립니다. 그중 어떤 아버지가 관에 파묻히기 전에 관 뚜껑 위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이게 진짜 리어왕이지!’ 싶더라고요. 

저도 배우가 아닌 분들, 연기 경험이 없는 분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작업을 해본 적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알거든요. 관객에게는 나보다 이분들이 훨씬 흥미로울 거라는 걸요. 이런 작업에서 배우는 무대 위에서 어떻게 존재하면 좋을지, 더 나아가 배우란 관객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는 사람인지, 본질적인 저의 역할을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됩니다.




글. 서해인

사진. 황인철